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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서구의 티베트 연구동향

chomice 2007. 12. 4. 14:05

작성자: 최성흠 (신구대 경영학부 겸임교수)

 

 

    서구의 티베트 연구 동향 


   서구인들이 티베트를 접촉할 때 느낌은 ‘신비로움’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신비로움은 당연히 티벳의 지리적 경외감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신비로움은 이국적이란 이미지와 타자적이란 이미지와 미개

함이라는 경멸을 포함하고 있을 것이다. 그들의 시각은 여전히 그러

한 관점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그들의 관점은 역사를 갖고 있으며 그

러한 견고한 역사는 선구자들 권위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선구적 학

자들의 이국적 타자적 관점의 기술은 각종 글들 그리고 논문들에 권

위 있는 주석으로 등장한다. 그 주석들은 서구인들의 동양 바라보기

라는 다양한 관찰자적 시점이고, 티베트는 피실험대상으로써 불평등

한 관계에 처한다. 

   존 K 페어뱅크(John K. Fairbank)는 그의 저서 <케임브리지 중국사

(The Cambridge History of China)> 서문에서 서구의 중국 연구에 대

한 접근을 4가지 관점으로 분류하여 “중국 이해의 4가지 관점은 선교,

외교, 신문잡지, 사회과학 등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고 했다.--- John

K. Fairbank, The cambridge History of China, Volume 14, Part I, Cam

bridge University Press, 1987, p.1.

   이러한 분류를 약간 확장하여 티베트 연구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이

다. 티베트의 경우에도 위의 서술은 추상적인 역사적 현상은 아니지만

서구의 저자들 상호간에 교차되고 또 지속되고 있는 티베트에 대한 해

석에도 적용할 수 있다. 티베트는 페어뱅크의 항목에 여행담(travelog

ue)을 추가할 수 있을 것이다.

   선교사적 관점(Missonary View) 

   처음으로 티베트를 통찰한 서구인은 예수회(Jesuits)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1624년 인도에서 건너와 찹파랑(Tsaparang)에 선교회(mission)

를 세우고, 서부 티베트 문화센터를 건립했다. 18세기 초  교황청은 카푸

친(Capuchins)에게 티베트를 선교활동지역으로 승인했고, 그는 1707년

라싸에 선교회를 세웠다. 그러나 예수회가 이에 불만을 품고 티베트를

떠나면서 갈등이 생겼고, 1745년 모든 선교활동은 붕괴되었다. 

   그러나 예수회 선교사들이 수집한 자료는 중국, 영국, 인도 등 각국에

매우 큰 이익이 되었다. 1774년 영국이 그들의 이익을 히말라야 너머로

확장하기로 하고, 조지 보글(George Bogle)을 쉬가쩨(Shigatse)에 보냈

을 때, 그들 정보의 가장 기초적인 자료는 북경에 거주하던 선교사 댄빌

(D`Anvill)이 10여년 전 만주 황제 강희제를 위해 그린 지도였다. 이 지도

는 그와 같은 교파 사람이 제공한 자료에 근거한 것이었다. 

   1762년 아우구스틴 조르지(Augustin Friar Giorgi)는 카푸친 선교사들이

제공한 정보를 기초로 로마에서 <티베트문자(Alphabetum Thibetanum)>

출간했다. 이 책은 티베트어(Tibetan script)를 서구에 소개한 것이다.

마지막 예수회 선교사인 이뽀리토 데시데리(Ippolito Desideri)는 티베트

체재하면서 몽골 준가르(Dzungar)부의 침략에 관한 중요한 기록을 남

겼다. 이 기록은 1904년까지 영어번역으로 출판되지는 않았지만, 초창기

목회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데시데리는 티베트어와 문화에

조예가 깊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그랬듯 학문적 탐구가 아니라 자신

을 무장하고 전쟁에 참여하기 위해 티베트를 연구했다. 그것은 티베트 종

교사상과 믿음을 논박하고 기독교신앙을 전파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열망은 선교사들의 지배적인 특징이었다. 그들은 기독교로 적절히

개종되어가는 티베트인들의 계시자로써, 지배적인 종교적 역할을 맡으려

했기 때문에 티베트를 변화를 위한 비옥한 토양으로 보고 있었다. 

   티베트어 사용권에서 가장 성공한 선교사들은 모라비아교파(Moravi

ans)였다. 그들은 데시데리의 감화를 받아 1885년 레(Leh)에 정착촌을

세웠다. 저명한 학자이자 선교사인 예치케(Jaeschke)는 1881년 <티베트

어-영어 사전> 서문(원서는 독일어)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우리의 노력 중에서 가장 중요한 동기는 전적으로 중앙아시아에 거주

하면서 티베트어를 읽고 말하는 수백만의 불교도들에게 빠르고 쉽게 기

독교를 전파하고자 하는 열망에서 출발한다.”--- H. Jaeschke, A Tibetan

-English Dictionary, Routledge and Kegan Paul, London, 1965, p.iii

   그럼에도 그들은 성경을 번역하는 노력을 통해 높은 수준의 학문 저술

을 발전시켰다. 예치케의 동료 프랑케(A. H. Francke)와 막스(K. Marx)는

1891년부터 1931년까지 미개척 분야로 남아있던 라다크(Ladakh)에 관한

역사적 민족적 연구분야에서 언어학적 지식을 생산했다. 

   선교사적 접근방식은 티베트 해석에 대한 서구의 중요한 모델을 소개

하기는 했지만 역사적으로는 단지 최초로 티베트를 다루었다는 의의만

있을 뿐이었다. 오늘날에도 기독교 선교사들은 티베트를 여전히 가장 우

선적으로 선교해야할 지역으로 보고 있으나, 현대에 그들이 기여한 학문

적 연구는 여전히 개척자들과 동일선상에 있지는 않다. 개척자들(pioneer

 figures)들은 기본적으로 티베트 사회를 퇴보적으로 여기고 있으며, 현대

선교사들은 티베트 문화 연구를 거의 중시하지 않고 있다. 

   현대 선교사들은 최근 학자들이 흔히 초점을 맞추고 있는 티베트 종교

체계와 제도 등 주제를 우선적으로 연구해야 함에 공통인식을 갖고 있다.

그들은 본질적으로 티베트 종교를 언어 문제로 보고 있다. 언어는 기독교

적 개념을 번역하고 서술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티베트 사회

의 종교적 양상에 주된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이는 최초의 선교사적 저작

부터 지금까지 티베트에 대한 관점과 연구에서 지배적인 관심이었다.

   여행자적 관점(Traveller`s View) 

   초기 선교사들 가운데 주목할 만한 사람들은 데시데리(Desideri)나 아베

위끄(Abbé Huc)처럼 여행을 기록한 선교사들이었다. 그들이 기록한 여행

기는 19세기 후반 전 유럽에서 널리 퍼졌다. 이들의 글은 탐험과 모험을

위한 잠재성을 갖는 지역으로 티베트를 바라보던 당시 서구 세대에게 영

감을 주었다. 티베트 여행의 꿈을 실현한 사람들은 알렉산드라 데이빗 닐

(Alexandra David-Neel)로부터 동기를 얻었다. 그는 여행자의 경험 중 본

질적 특성인 방랑 연대기를 중시, “정원의 대문을 넘어 탐험의 열망”으로

티베트를 묘사했다. ---Alexandra David Neel, Journey to Lhasa, Heine

mann, London, 1927, p.ix

   몇몇 여행기 작가들은 그들이 조우한 사회환경을 묘사하려 애썼다. 스

펜서 채프먼(Spencer Chapman)이 1930년대 라싸(Lhasa)에서 지낸 이야

기는 首都에 거주하는 티베트인들의 일상적 삶에 관한 흥미와 통찰을 주

었다. 하러(Harrer)도 1930-40년대 티베트 도시민들의 이러한 이야기들을

제공했다. 더욱 최근 들어 캐트리오나 배스(Catriona Bass)는 1980년대

교사로 근무하면서 느낀 평소 삶의 태도에 대한 느낌을 세심하게 묘사했

다. 이 작가들에게 주된 관심사는 탐험 과정이 아니라 그들이 만난 모든

라싸(Lhasa) 주민의 일과 삶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여행기라는 장르에서 보자면 예외적 존재들이었다. 새비

지 랜더(Savage Landor)로부터 시작한 서구의 위대한 기행 작가들은 그

들이 만난 티베트 환경이 유일무이한 것이고, 여행은 매우 힘들었음을 강

조하려고 노력했다. 이 작가들에게 중요한 것은 인간적 용기와 독보적 경

험을 결합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자기 업적을 쓰면서 종종 티베트를 신성

한 곳이라거나 혹은 신비스런 곳으로 특성화하여 타자성(otherness)이나

이국적인 것을 강조했다. 

   여행가들은 기본적으로 혹독한 환경과 산악의 장관에 충격을 받았다.

그들이 보았던 이런 것들이 근본적으로 티베트인들의 특성과 철학의 본성

을 대변했다. “여기에 올라와서 우리는 얼음과 명료성의 왕국, 궁극적이고

태고적 순수성의 왕국에 들어왔다.”라고 이탈리아 기행 작가 포스코 마라

이니(Fosco Maraini)는 쓰고 있다. ---Fosco Maraini, Secret Tibet, Rea

der`s Union, Hutchinson, London, 1954, p.46. 

   자연환경과 신비성이 결합된 인식을 마르코 팔리스(Marco Pallis)는 그

의 여행기 <저 너머, 그리고 라마들(Of Peaks and Lamas)>에서 더욱 발

전시켰다. ---Marco Pallis, Of Peaks and Lamas, cassell, London,

1946.

   티베트에 대한 여행가들의 인식은 우리가 티베트 문화를 이해하는 데

별 도움을 주지 못한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대중적 지지를 받고 있으

며, 티벳이 미지의 왕국(hidden kingdom) 또는 모험과 신비의 땅이라는

생각이 계속되도록 매우 큰 영향을 주었다. 티베트는 이런 관점에서 여전

히 서구 여행가들을 흥분시키고 있으며, 이는 티베트에 관한 다른 문학적

표현들과 거리가 있다. 1980년대 티베트가 서구 탐험가들에게 개방되면서

부터 방대한 양의 티베트 여행 경험을 기술한 출판물이 쏟아져 나왔다. 그

러나 그것들은 아직도 그들의 선조(Edwardian forebears)가 그랬던 것처

럼 기이한 그들의 경험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한 영향 때문에 1986-7

년 사이 일년 동안 외국 여행객 수천명이 라싸를 방문, 티베트에 대한 관심

이 최고조에 달했다.

   외교적 관점(The Diplomatic View) 

   영국은 그들의 정치적 경제적 이익을 중앙아시아로 확대하기 위해 티베

트와 관계를 맺기 원했다. 보글(Bogle)과 터너(Turner)의 임무는 티베트와

외교적 장을 여는 것이었다. 1835년에 출간한 터너(Turner)의 저작 <데시

라마의 장원(The Court of the Tashi Lama)>은 영어로 쓴 최초의 티베트

관련 서적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영국의 지역적 지배력 증가를 반영한

것이고, 이후 등장하는 티베트에 관한 문학적 작품들에 반향을 불러일으

키는 역할을 했다. 

   영국의 우선적 관심은 티베트의 영토적 한계를 구분하고, 통치자의 정치

적 권위와 인근 국가 관계도 명확히 하려는 것이었다. 이 과제에 필요한 정

보를 축적하기 위해 영국은 당대 모든 학자들을 후원했다. 헝가리의 저명

한 언어학자 코로스(Csoma de Koros)는 벵갈정부(Government of Beng

al) 지원을 받아 1930년대에 티베트어 사전을 편찬했다. 티베트 연구의 개

척자 중 한 사람인 찬드라 다스(Chandra Das)는 인도-영국정부 조사부

(the Survey of British Government of India)에 인도학자(pundits) 일원으

로 고용되어 지역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영국정부가 보내는 인도인들을

훈련시켰다. 

   영국 육군 대령 영허스밴드(Younghusband)는 1886년 만주에서 중국을

거쳐 인도로 여행했다. 1904년 그는 영국군을 이끌고 티베트를 침략, 급히

몽골로 망명한 달라이 라마를 대신한 섭정을 위협, 강제로 무역관계를 맺

게 했다. 그는 티베트가 서구에 알려지게 된 것은 영국과 러시아 간 이른

‘드넓은 게임(Great Game)'이라는 세력 갈등을 계기로 영국의 군사적

탐험에 의해서라고 말한다.  

   영허스밴드가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티베트에 들어간 1903년 무렵 티베

트 연구가 최고조에 달했다. 이 임무에 동참했던 주 멤버들이 책 8권을

판데, 그 중 주목할 만한 사람은 퍼스벌 랜던(Perceval! Landon)이다. 그는

임무 중 런던타임즈(London Times)와 연락을 취하면서 라싸(Lhasa)의

모습을 매우 상세하게 묘사했다. ---Perceval! Landon, 'The Opening of

Tibet An Account of the Lhasa and the Country and People of the Cen

tral Tibet and of the Progress of the Mission sent there by the English

Government in 1903-4(Vols. 1 & 2),  London 1905. First Ed. 2 vols. Ro

yal Octavo.

   또 영허스밴드(Younghusband)의 주치의였던 웨덜(Waddell L. A. Wa

ddell)은 영국 최초 티베트 관련 대학교수가 되었다. ---Waddell L. A. Wa

ddell, Lhasa and Its Mysteries : With a Record of the Expedition of

1903-1904, London, 1905. 참조 

   티베트와 관계를 맺으면서 적어도 외교관이나 정부관료들에게 티베트

더 이상 먼 곳의 고립되어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개념이 확산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변화는 티베트가 유럽의 정부와 지도자들에게 통상적 관

계 범위 내에 편입해야 하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국가라는 인식을 심어주

었다. 티베트의 지위와 범위를 확정하기 위해서는 우선 역사, 지리, 정치

체제 등에 관한 정보가 급했다. 이런 것들은 영국이 그 지역에서 이익을

추구할 수 있는 가능성이었다. ---Moorcroft Karl E. Meyer and Shareen

Blair Brysac, Tournament of Shadows: The Great Game and the Race

for Empire in Central Asia, Washington, DC: Counterpoint, 1999. 참조.

이 책은 윌리엄 무어크로프트(William Moorcroft)를 ‘말 수의사(horse

doctor)'라 묘사하고 있다. 

   그들은 인도군대가 사용할 말을 구입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를 찾았고,

배일리(Bayley)는 주요 강 발원지를 찾는 것이 임무였다. 이밖에도 많은

사람들이 티베트를 인도에서 생산하는 차(茶) 판매 시장으로 활용하려

했다. 호제슨(Hodgeson)은 훗날 티베트 지역에 대한 많은 저술을 남기

면서 남부 히말라야에 유럽인들이 거주할 수 있도록 하는 안내서를 저술

하기도 하였다. 

   영허스밴드(Younghusband), 찰스 벨(Bell), 오코너(O`Connor), 맥도

널드(MacDonald), 굴드(Gould) 등 많은 티베트 저술가들은 대부분 영국

정부를 위해 그들의 능력을 다했다. 그들은 티베트 역사를 중국, 영국 그

리고 러시아 등 지역 세력들 간 권력이 상호 경쟁하는 과정으로 구성하려

했다. 그 결과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반에 걸쳐 등장한 티베트 관련 학술

저작들은 대부분 티베트의 영토 경계와 획정에 관심을 집중했다. Mehra,

Lamb, Kaur Singh, Addy 등이 대표 학자들인데 이들은 모두 영국의 성과

를 일차적 자료로 사용했다. 그러므로 역사적 관점은 당연히 영국 소설가

키플링(Kipling)이 영국과 러시아의 티베트에 대한 세력갈등에서 영감을

얻은 것과 같은 시각적 배경을 갖고 있다. 이러한 관점은 1950년 중국이

티베트를 자기들 영토라고 주장하며 점령하자 더 확고해졌다. 티베트의

지위에 대한 상세하고 지속적인 연구가 벌어졌고, 게다가 1962년 중국과

인도 간 과거 티베트 국경에 대한 논쟁이 일어나자 더 뜨거워졌다.

   저널리스트적 접근(The Journalistic Approach) 

   저널리스트로 서구 출판계에 처음으로 광범위하게 주목을 받은 사람은

영허스밴드(Younghusband) 원정에 동행했던 랜던(Perceval! Landon)이

었다. 그는 '데일리 메일(Daily Mail)' 기자였던 에드먼드 챈들러(Edmund

Chandler)와 함께 원정에 동참, 티베트에 관한 저널적 관점이 출현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걍제(Gyantse) 근처 최전방인 캄파쫑(Khampa Dzong)

에서 날아온 기사는 영국 여론에 강한 충격을 주었으며, 그는 소련에 대해

적대적이었으며 벵골 분할, 폴란드 국경 분할 등을 주도한 영국의 보수적

정치가 커즌(Curzon)의 추종자들이 대중적 무시 속에 티베트에 접근하던

것을 광범위한 주목으로 바꿨다. 그러나 그의 작업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1950년대부터 티베트에 대한 기사는 거의 사라지고 일부 기사들조차 여행

담과 다를 것이 없었다. 

   1950년 중국의 침입은 티베트에 대한 흥미를 폭 넓게 일으켰다. 이 때는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냉전이 최절정기이기도 했다. 반중국 감정은 자동으

로 반공산주의 열기를 서구에 퍼트렸다. 서구인들은 티베트 상황을 공산

주의가 세계를 지배하려는 열망을 예시하는 것이라고 보는 경향이 있다.

달라이 라마가 1959년 인도로 망명하자 티베트 민중봉기와 그 결과에 대한

대중 저술들이 범람했다. 이 사건에 자극받아 글을 쓴 부류의 사람들은 대

체로 선교적 감각이나 극적인 드라마와 같은 느낌을 갖고 있었다. 로웰 토

마스(Lowell Thomas)는 1959년 중국군의 유혈진압을 기술한 그의 서사시

에서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이 비극적 결말은······모험담이 아닙니다. 이것은 유쾌한 이야기도 아

닙니다. 그러나, 이것은 진실입니다. 그리고, 우리 자유세계는 이것에 대해

더욱 많은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사건의 주요 의의를 폭동, 망명 등으로 여기고 여기에 초점을 맞추는

작가들이 저널적 인식을 공유하고 있었다. 사건 주역들의 공적은 모험적

이거나 개인적 영웅주의로 묘사되었을 뿐, 그 사건이 일어나게 된 계기나

그들 역할을 넘어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행동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에 대

해서는 설명하고 있지 않다. 이 사건으로 인해 생겨나거나 변화된 사회적

속성은 이들 저자들의 시야 내에 있지 않다. 

   중국적 시각에 입각해서 전통 티베트 사회를 기술하려는 저자들도 있지

만 그들은 중국이 티베트에 가져다준 사회적 발전을 찬양하는 입장이어서

1950년 이전 티베트의 사회적 조건을 특히 강조하였다. (Felix Greene,

Gelder, Han Suyin, Epstein)

   그들이 티베트의 현재를 논할 때는 언제나 그들이 목격한 중국적 현대화

를 향한 티베트 사회의 경제적 발전과 진보를 강조한다. 

   티베트 망명운동에 동조적인 저자들(Avedon의 연구가 대표적이다)은

중국 통치 하에 있는 티베트인들의 무저항적 희생과 고통을 강조했다. 이

들의 연구에서도 티베트를 해석하는 방법은 기본적으로 저널적 경험이다.

이러한 관점은 1987년에 일어난 사건 때 티베트인과 서구인들의 목격을

통해 더욱 강화되었다. 르뽀 형식의 글들은 센세이셔널리즘에 입각해서

사건들의 연대기적 나열을 보여줬다. 예를 들어 한 저자는 1990년 티베트

를 ‘티베트에서 중국이 자행한 억압의 최초 목격’(the first-ever eye

witness account of chinese oppression in Tibet)이라는 식으로 기술했

다. 이런 유형의 저자들은 사회적 변화 또는 티베트의 정치 이익집단 차이

점에 대한 질문을 거의 탐구하지 않는다. 티베트에 대한 저널적 글들은

티베트에서 드라마틱하게 전개된 두 지도자간의 갈등을 문제점으로 탐구

하는 것에 대해 여전히 제한적이다.

   사회과학적 접근의 출현(The Emergence of a Social Science Approach) 

   오늘날 티베트 연구는 뚜렷한 학문적 규율이 생겨났다. 그것은 동양을

연구하는 서구의 전통 속에서 이해할 수 있는 관념이다. 문화적 동질성과

지리적 위치 등으로부터 서구 학자들은 티베트인들 스스로 구축한 별개의

전통인 티베트 문화의 상위에 등극하려 했다. 
  

   서구의 티베트 연구는 서구와 티베트의 역사적 만남에 뿌리를 두고 있

으며 어떤 분야는 이미 논의했다. 그들은 여전히 스스로를 원류로 간주하

고 한편으로는 티베트 불교에 대해 지적 연구를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히말라야 너머로 서구의 정치적 이익을 확장시켰다. 

   더욱 최근 들어 티베트 연구 분야는 국제회의, 대학이라는 거점 그리고

티베트 연구에 공헌하는 학술잡지에 대한 정례적 기부 등을 통해 광범위

하게 제도화 되어 가고 있다. 수용할 만한 학술적 자료들도 있고, 번역을

위한 표준적 체제도 갖췄으며, 연구 영역의 국제간 연계도 마련됐다. 티

베트 연구의 선구자들은 교회의 제국적 행정체제 보호 아래 활동했지만

현대 티베트 연구는 서구의 학문 제도 존재에 의해 정통성을 갖게 됐다. 

   티벳 연구의 학문 분야는 두 가지 전통이 대별할 수 있다. 그 하나는

현재도 계속되고 있는 문서를 분석하는 것이다. 선교 학자들이 수집한

지식은 19세기 목적에 따라 산스크리트(Sanskrit)학자들이 연구를 통해

티베트 불교를 공격하도록 허용됐었다. 그 내용은 티베트 불교 서적의

원류와 산스크리트 전통의 관계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들은 티베트

종교체계를 불교 형식에서 퇴보한 것으로 인식하고 라마교(Lamaism)라

고 폄하했다. 
 

   문서 분석의 전통은 기본적으로 불교 저술과 해설서에 초점을 두고 지

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지금은 티베트가 불교철학과 수행 방면에 공헌

하고 이를 발전시켰음을 인정하고 있다. 현대 문서분석 학자들--티베트

학자 자신들--은 티베트 불교역사와 불교사상을 폭 넓게 주목하고 있다.

그들은 티베트 초기역사에 관심을 가질 뿐만 아니라 불교에 관한 저술을

다량 생산하던 시기도 주목, 티베트 원시종교인 뵌뽀교(Bon) 연구도 주

도했다. 이러한 전통에서는 티벳인들이 만들어내고 있는 사회적 조건을

연구하는 것보다 문서를 연구하는 것이 더욱 더 중요하다. 

   학문적 티베트 연구의 두 번째 규범은 티베트 문화와 사회에 대한 연구

에 서구의 사회과학적 방법론을 적용하는 것이다. 이 계통 학자들이 주목

하는 것은 인간과 사회다. 그렇지만 1950년대 이 방법이 등장했을 때 티

베트는 서구와 격리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런 주제에 대해 일차적 조사를

할 기회가 없었다. 이 상황은 1980년대까지 지속되었다. 

   망명자들이 인도 북부로 들어오면서 그들을 조사대상자로 하여 사회과

학자들의 티베트 사회에 대한 행태적 조사가 가능해졌다. 일군의 학자들

은 망명공동체에서 과거 경험을 인터뷰한 다음 티베트 전통 사회체계를

재구성하려고 노력했다.(Aziz, Goldstein, Eva Dargyay, Franz Michael) 

   이 학자들이 전통 사회 재구성에 몰두하는 반면, 다른 사회과학자들은

히말라야 지역 티베트 어민(호수어민)들을 대상으로 일차 조사를 진행,

전통 티베트 사회에 관한 기본적 비교분석 자료를 제공했다. 그러나 중국

학자들이 수행한 연구를 제외하고 아직도 많은 부분이 중국 외부로 알려

지지는 않고 있다. 즉, 서구 학자들이 수행한 티베트 자체에 대한 연구는

거의 없다 하겠다. 

   두 가지 접근법, 즉 재구성법과 또 다른 방법의 이면에는 학자들이 설명

하려는 공통점이 하나 있는데 바로 전통 티베트 사회라는 개념이다. 또

소수이기는 하지만 망명 공동체의 적응과 변화를 연구하는 학자들도 있다.

이들의 연구는 망명 생활 경험에 따른 새로운 이데올로기와 정체성의 출

현을 반영하고 있다.(Novak, Saklani, Palakshappa) 

   그러나 서구 학자들은 최근 티베트 발전 상황을 조사하고 있지 않다.

부분적인 이유이긴 하지만 그곳이 여전히 외국인들이 접촉할 수 없는 채

로 남아 있기 때문에 1950년대 이후 티베트를 연구한다는 것은 별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즉, 전통 사회가 극명하게 소멸되었기 때문에 연구할 가치

와 흥미가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티베트 연구분야  학자들에게 널

리 퍼졌다. 예를 들어 당대 언어와 문장들은 거의 주목을 받지 못하거나

분석되지 못하고 있다. 

   티베트 당대 발전에 대해 학자들이 흥미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당대

문제에 대해서는 두 방면의 논객들이 주도하고 있다. 티베트인과 그들에

게 동조적인 측은 중국의 전통문화 말살을 비난해왔다. 그들의 비난은 티

베트 문화에서 발전은 없었음을 함축하는 것이다. 그 반대편에 선 중국은

지난 40여년 동안 티베트는 발전했고 문명사회로 진입해왔다고 논박한다. 

   그들 간 적대적이고 호전적인 논쟁 때문에 오늘날 티베트 사회에 대해

진정으로 관심을 가져야 할 이슈는 점점 더 모호해지고 있다. 지난 40여년

간 중국이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를 티베트 사회에 강제로 이식하면서 티베

트인들의 전통 세계관이 직접 도전받았으며, 의심할 여지없이 전통 티베

트 문화와 사회체제도 거대한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티베트 경제 변화는

외국 학자들에게 별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 예를 들어 1950년 이후 서장

자치구에 건설한 도로 2만2000km는 티베트 지역 사회경제적 관계를 극적

으로 변화시켰다. 중국이 티베트를 통치, 티베트에 가장 주된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그것은 서구 학자들이 쓰고 있는 것처럼 인민

을 지배하는 파괴자가 아니라 또 다른 형태의 기제에 의한 것이다. 이러한

변화 중 일부는 심한 논쟁이 있었으나 서구의 학술적 글에서는 여전히 사

회 현상으로서 문서화 되지 못했고 묘사조차 되지 못하였다. 

   서구는 티베트 접촉을 방해받고 있기 때문에 현대 티베트에 관한 연구

확산 속도가 느린 반면, 중국은 일련의 티베트 연구소를 세워 연구를 용이

하게 했다. 1950년대 중국은 많은 사회과학자들을 티베트에 보내 현지상

황을 조사하게 했으나 이 시기 작성한 많은 문건들은 중화인민공화국 외

부로 유출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다. 그들은 또 ‘소수민족’(national

minority)을 위한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1979년 개혁개방 이후 연구 핵심

으로 발전시키고 있다. 

   개혁개방 시기에 학술 연구소는 더욱 성장하여 1985년 서장(西藏)대학

이 세워졌으며, 1986년 중국티베트학연구센터(中國藏學硏究中心)가 북경

에 세워졌다. 중국 사회과학원의 지부라 할 수 있는 서장사회과학원은 그

보다 앞선 1985년에 세워졌다. 

   더욱 중요한 것은 아마 티베트어 서적 출판사가 라싸, 북경 뿐 아니라

티베트 자치지역 밖에서도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들은 방대

한 양의 종교서적을 재출간했고, 중국어 번역본 제작의 지원자가 되었을

뿐 아니라 영어, 심지어 티베트어로도 출판했다. 티베트 관련 출판 부흥

기는 1984년에 출판된 세 권의 책 <티베트어-중국어사전(Great Tibetan-

Chinese Dictionary; 藏漢大辭典) ---티베트어로는 Bod-rGya Tsing-mDz

od Chen-mo>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들 연구소는 서구의 학문 방법론을 사용하여 티베트 자체를 연구하는

티베트학의 효시라 할 수 있다. Dung-dkar bLo-bzang `Phrim-las

(Dungkar Lobsang Thrinley)은 서구 사회과학 방법론으로 티베트 정치체

제 원형을 조사하여 Bod-kyi Chos Srid Zung `Brel-sKor bShad-pa(The

Merging of Religious and Secular Rule in Tibet : 티베트의 정교일치)를

출간했다. 서구에서 세운 전통에 따라 이 분야 학자들은 당대연구보다는

텍스트, 비문, 고대사에 초점을 맞추어왔다. 티베트 연구분야에서 당대

학자들이 방법론을 적용한 것은 당연히 중국 정부의 이론적 정치적 의도

에  영향 받거나 강제된 것이다. 

   서구에서 당대 티베트 상황을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런던 대학 ‘아시아

-아프리카 학회’(School of Oriental and Africa Studies)가 1990년 ‘티베

트 40년:1950-1990’(Forty Years On : Tibet 1950-1990)이란 제목으로 회의

를 개최하면서부터라 할 수 있다. 지난 40년간 티베트 사회의 발전이라는

주제를 채택함으로써 당대 티베트 연구를 최근 시작했던 학자들을 함께

모을 수 있었다. 게다가 고대 연구로 명성을 얻었던 학자들이 그들의 기술

적 축적을 현대 영역에 적용할 수 있는 기회도 갖게 되었다. 그 결과 고차

원적인 학문적 토론을 통해서만 현재 티베트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복잡하

고 민감한 이슈들을 심층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예견되어졌다. 

   그러나 여전히 티베트 지역의 직접적 접촉은 통제되어 있기 때문에 망명

정부를 통하거나 혹은 중국에서 발행한 자료들의 재해석을 통한 서구의

티베트 연구는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다. 특히 서구 중심 보편 가치체계

하의 이론적 혹은 사상적 적용은 제한적인 자료를 더욱 제한적으로 인용하

게 하여 티베트인들의 티베트에 대한 사고는 소외될 지도 모른다.

출처 : 박근형의 티베트 사천 자료실
글쓴이 : berdl28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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