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김호동 교수의 중앙유라시아 역사기행(26) 끝]
몽골 사회주의 혁명과 '붉은 영웅'
청 붕괴 후 임시정부 세우고 독립운동
소련 이어 두 번째 사회주의 국가로
1992년 1월 몽골인들은 새로운 헌법을 공포하고 국호도 ‘몽골인민공화국’에서 ‘몽골국(Mongol Uls)’으로 바꾸었다. 국호의 개명이 이제까지 종주국을 자처해 오던 소련이 해체됨에 따라 사회주의 체제의 굴레를 내던지고 자유경제와 민주선거를 지향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임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사회주의 혁명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 ‘울란바토르(Ulaanbaatar)’라는 이름을 바꾸자는 주장이 제기되지는 않은 듯하다.
현재 몽골의 수도인 이 도시가 17세기에 처음 세워졌을 때의 이름은 ‘우르구우(?rg??·거주지)’였고, 러시아나 유럽인들에게도 그 변형된 발음으로 전해져 ‘우르가(Urga)’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18세기에 들어 ‘이흐 후레에(Ikh Kh?ree·커다란 둔영)’라는 이름으로도 불리기 시작했고, 청나라 자료에는 이를 한자로 옮긴 ‘고륜(庫倫)’이라는 표기가 자주 사용되었다. 그러다가 20세기에 들어와 사회주의 혁명이 터지고 1924년 이 도시가 정식으로 인민공화국의 수도가 되면서 그 명칭도 혁명적 의미를 지닌 ‘붉은 영웅’, 즉 울란바토르로 바뀌게 된 것이다.
몽골은 러시아의 뒤를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사회주의 혁명을 성공시킨 나라이다. 이는 2차 대전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했던 중국이나 북한보다도 무려 20년 이상이나 앞선 것이다. 다만 몽골은 소련의 위성국 처지에 머물면서 국제사회에서 주목을 받지 못했고, 우리와의 관계도 완전히 단절되어 버렸기 때문에, 우리는 20세기에 들어와 그들이 겪은 우여곡절에 대해서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나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들의 근현대사도 결코 순탄치만은 않은 것이었다. 고비사막 이북의 ‘외몽골’과 이남의 ‘내몽골’이 2~3세기에 걸쳐 만주족이 지배하는 청제국의 일원으로 존재하다가 한쪽은 독립된 국가로 발전하고 다른 한쪽은 중국의 일부가 되어 버렸다.
우리가 남북으로 분단된 것과도 유사한 상황이라고 볼 수 있다면, 내몽골은 장차 중국과 몽골의 정치·외교적 관계에 있어서 매우 민감한 문제라고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아무튼 청 지배하의 몽골이 남북으로 ‘분단’된 상황은 20세기 초 청·러 두 제국의 붕괴와 러시아 혁명이라는 역사적 격랑을 몽골이 어떻게 헤쳐나갔는가 하는 문제와 직결되므로, 우리의 눈길을 1세기 전으로 되돌리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19세기 말 몽골은 이미 과거와 같은 유목사회의 다이내미즘을 상실해가고 있었다. 그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청나라가 실시한 팔기제(八旗制)의 영향, 티베트 불교의 확산으로 인한 사회·경제적 여파, 중국 상업자본의 진출에 의한 유목경제의 붕괴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팔기제는 유목민이 자유롭게 이동하는 것을 금지하고 일정한 영역 안에 머무르도록 규정했기 때문에, 이로 인해 몽골인은 기동성이라는 가장 중요한 사회적 동력과 무기를 상실하고 말았다.
또한 불교 사원이 초원 곳곳에 생겨나고 정치·경제적 영향력도 커지면서 수많은 몽골인이 라마승을 자원하게 되었고, 급기야 19세기 말 성인남자 전체의 반 가까운 수가 라마승이 될 정도였다. 물론 이들이 모두 절에서 수행하는 사람들은 아니었고 재가(在家)·대처(帶妻)하는 승려가 많았지만, 이는 분명히 유목사회를 변질시키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청 정부의 면허를 받아 초원 각지에서 활동하던 산서(山西)성 출신의 한인(漢人) 상인들은 고리대금업을 통해서 몽골인들의 경제를 장악하기 시작했다. 거액의 부채를 지게 된 귀족들은 일반 유목민에게 그 상환을 전가하였고, 이로써 유목민의 사회·경제적 상황은 극도로 악화되어 갔다.
19세기 말 몽골 각지에서 한인 상점들에 대한 약탈과 방화 사건이 터지고, 1900년에는 울리야수타이라는 도시에서 폭동이 일어나 청나라 관리와 병사들이 추방당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나아가 1906년에는 청조가 내외적인 온갖 위기와 모순을 타개하기 위하여 소위 ‘신정(新政)’을 표방하고 그 일환으로 관제개혁을 실시하였는데, 이제까지 몽골을 일종의 특별구역으로 취급하던 관례를 깨고 중국 내지와 동일한 관제를 그대로 적용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는 몽골의 귀족·왕공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가져다주었으며, 1911년 여름에는 불교 교단의 수장이던 ‘젭춘담바 후툭투(Jebtsundamba Qutuqtu·일명 보그드 한)’, 그리고 당시 몽골을 지배하는 4명의 칸이 러시아의 페테르부르크로 밀사를 파견하여, 청 정부가 관제개혁을 취소하도록 압력을 넣어달라는 요청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 사건은 몽골의 왕공들이 이미 청나라가 붕괴되기 전에 독자적 생존을 모색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1911년 10월 드디어 호북(湖北)성 무창기의(武昌起義)를 시발점으로 신해혁명이 터지고 청나라가 붕괴되자마자 몽골의 귀족들은 우르가에 모여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독립을 선언하였다. 중국에서 실권을 장악한 원세개(袁世凱)가 그 다음 해에 몽골 측에 전문(電文)을 보내 새로 성립한 중화민국으로 복귀할 것을 종용했는데, 이에 대해서 그들은 다음과 같은 내용의 답신을 보냈다. “중국과 몽골은 모두 만주인에 의해 지배를 받으면서 통합되어 있었다. 이제 만주인들의 나라가 사라졌으니 우리는 서로 제 갈 길을 가야 할 것이다.” 이 답신은 청제국과 몽골의 관계에 대한 몽골인의 관점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즉 몽골은 ‘중국인(=한인)’의 지배를 받은 것이 아니라 만주인의 지배를 받았을 뿐이며, 그런 면에서 중국인과 몽골인은 모두 제국의 동일한 신민(臣民)에 불과하고, 정치적으로 어느 일방이 다른 일방을 지배할 아무런 역사적 근거도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세워진 몽골의 임시정부는 젭춘담바를 수반으로 추대하였다. 그는 세속 귀족이 아니라 승려에 불과했다. 그러나 티베트 불교가 도입된 이후 칭기즈칸의 후예들, 즉 ‘황금씨족’의 권위는 극도로 약화되어 버렸기 때문에 당시와 같은 정치적 혼란기에 누구나 승복할 수 있는 지도자를 달리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임시정부는 청 지배하에 있던 모든 몽골인을 연합하여 독립국가를 건설하려는 ‘범(汎)몽골주의’를 지향하였고, 그런 면에서 다분히 민족주의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임시정부는 서몽골, 즉 호브드(Khobd) 지방의 몽골인은 비교적 수월하게 편입시켰다.
그러나 문제는 동쪽의 흥안령(興安嶺) 지역과 남쪽의 내몽골 지역에 있던 몽골인을 여하히 통합하느냐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동부 몽골은 러·일 간의 비밀협약에 의해 일본의 영향권으로 인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 지역 몽골인의 의지만으로 결정될 성질이 아니었다. 내몽골 역시 중국이 보다 많은 영향력을 갖고 있어 쉽사리 기득권을 포기하려 하지 않았고, 나아가 외몽골에 비해 지역적 통합성을 이미 상실한 내몽골의 일부 귀족은 임시정부로 편입되는 것이 자신들의 이해에 더 불리하다고 판단하여 반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같은 범몽골적 통합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중국, 러시아, 일본 같은 주변 강대국의 태도였다. 즉 신생 몽골이 정식 독립국으로 가는 관건은 이들 국가가 몽골의 국제적 지위를 인정하느냐 여부에 달렸던 것이다. 이 점에서 성공 가능성은 극히 희박했다. 중국이 몽골을 청조의 영토였다는 역사적 사실을 내세워 독립에 반대하였음은 두 말할 것도 없다. 러시아도 몽골이 중국의 영토로 완전히 편입되는 것을 탐탁하게 여기지는 않았지만 독립국보다는 일종의 자치지역으로 남는 것이 더 유리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결국 러·중·일 3국은 1915년 캬흐타협약을 통해서 몽골을 중국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하나의 자치지역으로 설정하고 말았다. 이로써 1911년에 시작된 소위 ‘1차 혁명’은 실패로 끝나게 되었다. 이는 민족주의 입장에 기초한 독립운동의 실패를 의미하며, 결국 독립을 위해서는 다른 방향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사회주의 혁명으로의 길이었다.
캬흐타협약의 결과 몽골이 중국의 자치구역으로 편입되긴 하였으나 실제로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러시아였다. 이미 많은 러시아인이 몽골에서 활동하고 있었고, 이들에 의해 근대적 학교가 세워지고 청년들이 새로운 교육을 받게 되었다. 후일 혁명을 주도한 사람들은 대부분 여기에서 배출되었다. 예를 들어 ‘몽골 혁명의 아버지’라 칭해지는 수흐바토르(Sukhebatar)와 ‘몽골의 스탈린’이라는 별명이 붙은 초이발상(Choibalsang) 등이 그러하다. 이들은 몽골의 근본 문제들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중국의 지배를 타파하고 사회주의 혁명을 택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 일본군과 함께 있는 덕왕(왼쪽)의 모습.
왜냐하면 몽골에 대한 직접 지배의 야망을 포기하지 않던 중국이 군대를 파견하여 자치를 포기하고 직속을 강요하는 조약을 1920년에 체결하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러시아 혁명이 터진 뒤 백군파(白軍派) 장군으로서 ‘미친 남작(Mad Baron)’이라는 별명으로 불린 운게른 스테른베르그(Ungern Sternberg)가 1920년 몽골에 침입하여 잔혹한 살상과 약탈을 자행한 뒤, 진보적 몽골 청년들은 볼셰비키 쪽으로 경도되기 시작했다.
1919년 말 우르가에 두 개의 진보적 조직이 형성되었다. 하나는 수흐바토르에 의해, 다른 하나는 초이발상에 의해 주도된 것이었는데 이 조직에 가담한 사람들의 계층적 배경을 보면 빈민층, 라마승, 부르주아 등 다양했다. 따라서 혁명의 목적도 희미할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어 조직의 목적 가운데 하나가 과거 라마교의 영화를 회복하는 것이라고 명시될 정도였다. 이들 조직이 본격적 혁명조직으로 발돋움한 것은 코민테른과의 접촉을 통해서였다. 1920년 코민테른의 대표가 우르가에 도착해 접촉이 이루어지면서 그를 자문으로 하여 두 집단이 통합되었고 드디어 ‘몽골인민당’이 결성되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몽골의 독립을 위해서는 소련의 지원이 필수적이라고 판단했고, 이에 젭춘담바의 친서를 받아서 대표단을 이르쿠츠크로 파견했다. 이렇게 해서 코민테른의 지시를 받는 몽골혁명이 본격적으로 가동되기 시작한 것이다.
몽골의 혁명조직은 1921년부터 소련군의 지원을 받으며 ‘빨치산’식 전투를 감행해 먼저 ‘미친 남작’의 군대를 격파하였다. 또한 당시 몽골에는 안휘(安徽)군벌에 속하는 서수쟁(徐樹錚)이 이끄는 중국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몽골인들은 1921년 3월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우르가에 주둔하고 있던 중국군과 본격적인 전투를 개시하였는데, 놀랍게도 신속하게 우르가를 점령하고 중국군을 축출하는 데 성공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중국의 세력을 완전히 몰아낸 몽골 혁명세력은 독립정권을 출범시켰지만 젭춘담바가 살아있는 한 그의 권위를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를 새 정권의 수반으로 추대하였다. ‘몽골인민공화국’은 젭춘담바가 사망한 1924년 비로소 정식으로 선포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신생 국가의 장래는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1930년대에 들어가면서 동북아 정세가 크게 요동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본은 괴뢰정권 만주국을 세우고, 이제까지 일본의 영향권 안에 있던 흥안령 지역을 ‘흥안성(興安省)’으로 만들어 만주국에 편입시켰다. 소련과 몽골은 이러한 일본의 움직임에 위협을 느껴 1936년에 상호원조 의정서에 조인했고, 1937년에는 일본의 위협에 대처한다는 명분하에 소련군이 몽골에 진주하게 되었다. 스탈린 치하의 소련과 밀착하면서 몽골 내부에서도 급격한 사회주의화가 진행되고 스탈린식 정치가 모방되기 시작했다. 초이발상은 이제까지 혁명에 많은 공을 세운 인사들을 ‘부르주아 민족주의자’라는 이름으로 제거하고 대대적 숙청을 단행하였다. 대외적 위기도 가중되었다. 1939년 일본이 몽골 동부 국경지역을 침공한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일본은 외몽골 진출에 실패했지만 중국 진출에 전략적으로 긴요했던 내몽골에 대해서는 비교적 성공적이었다. 1937년 중일전쟁이 터지자 중국으로부터 독립하여 몽골의 자치정부를 수립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던 덕왕(德王)이라는 몽골 귀족을 앞세워 일본은 ‘몽골연맹자치정부’를 조직하였고, 이 정부는 덕왕의 원래 의도와는 달리 사실상 일본의 괴뢰정권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울란푸(烏蘭夫·Ulanfu)를 위시한 많은 몽골인이 중국공산당에 가입해 항일 전선에 가담하게 되었다. 일본이 패전한 뒤 공산당은 ‘네이멍구(內蒙古·내몽골의 중국식 발음)자치구인민정부’를 세웠지만, 국민당을 축출하고 대륙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자 그것을 폐지하고 ‘네이멍구자치구’를 설치해 마침내 중화인민공화국의 영토로 편입시켜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이에 비하면 외몽골은 비록 소련의 위성국으로 전락하긴 했지만 독립된 국가로서의 형식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그나마 다행이라 아니할 수 없으니, 그렇지 않았다면 오늘날의 명실상부한 주권국가 ‘몽골국’은 존재할 수 없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 할하강 전투::
소·몽 연합군과 일본군의 전투… 일본 참패로 끝나
1939년 여름 몽골의 동부 국경지역에서 소·몽 연합군과 일본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를 가리킨다. 부유르 호수로 흘러들어가는 할하강 부근에서 벌어졌기 때문에 러시아와 몽골에서는 ‘할하강 전투’라고 부르지만 일본에서는 그 부근에 있던 조그만 마을의 이름을 따서 ‘노몬한 사건’이라고 부른다.
이 전투에서 일본은 정예 관동군(關東軍)을 투입했지만 주코프(G.Zhukov)를 사령관으로 하는 소련군은 탱크의 막강한 화력을 이용하여 전세를 압도하고 승리를 거두었다. 일본은 상당한 인명 피해를 입었고, 9월 15일 협정이 체결됨으로써 전투가 끝나게 되었다.
/ 김호동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hdkim@snu.ac.kr
21세기 한국의 미래 위한 나침반 되길

‘중앙유라시아 역사기행’을 통해서 우리는 지난 3000년 동안 중앙유라시아의 초원과 사막을 무대로 펼쳐진 다양한 역사의 현장들을 찾아보았다. 그동안 이 글을 챙겨서 읽은 독자라면 그 수많은 현장에서 조금은 낯선 역사의 주인공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가졌을 것이다.
흑해(黑海) 연안의 초원을 주름잡던 스키타이인, 실크로드를 누비던 소그드의 국제상인들, ‘타타르의 땅’을 찾아나선 유럽의 프란체스코파 수사(修士)들, 만주족 강희제와 제국의 운명을 걸고 대결을 벌인 갈단…. 어쩌다 들어봤을지 모르지만 우리와는 별로 관계가 없는 먼 나라 이야기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다. 만약 그러했다면 그것은 필자의 의사전달이나 표현능력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번 ‘역사기행’을 통해서 전해주고 싶었던 메시지는, 그 동안 우리가 생소하게 여겨온 중앙유라시아라는 지역에서 벌어진 일들이 사실은 세계사의 전개에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실크로드 ‘과잉’에서 벗어날 때
또한 그곳에서 벌어진 사건들은 마치 강력한 지진파가 외부를 향해 퍼져나가듯 주변 세계, 즉 동아시아·서아시아와 유럽에 부단한 충격을 가하며 그 역사적 흐름에 영향을 미쳐왔다는 사실을 여러 사례를 통해서 보여주려고 했던 것이다.
전문적인 연구자냐 아니냐를 불문하고 이제까지 중앙유라시아에 대한 관심의 초점은 지나치리만큼 실크로드에 맞추어져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물론 실크로드가 역사적으로 동서문화를 매개하는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본래 동아시아와 서아시아를 연결하던 내륙 교통로를 지칭하던 실크로드라는 말의 의미가 점차 확대되어 북방의 초원루트와 남방의 해양루트까지 포괄하게 되면서 이제는 역사적 개념으로서의 유효성을 의심케 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 지난 7월 11일 몽골 울란바토르에서 열린 몽골 전통축제 '나담축제' 개막식에서 기마대가 트랙을 따라 행진하고 있다. / photo 조선일보 DB
더구나 실크로드의 상업적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그 이국적이고 낭만적인 측면이 정도 이상으로 부각되었고, 이는 실크로드의 역사적 진상을 호도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따라서 이제는 중앙유라시아의 역사를 바라볼 때 이 같은 실크로드 ‘과잉’에서 벗어나 그 세계사적 의미를 진지하게 다시 검토해야 할 때가 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최근 해외 역사학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는 우리에게 좋은 출발점을 제시하고 있다. 즉 냉전의 종말과 인터넷의 확산은 그야말로 ‘지구화(globalization)’ 시대로의 진입을 실감케 하고 있는데, 이러한 시대적 변화에 발맞추어 역사학계에서도 이제까지 고립되고 독립적인 국가·지역·문명에 대한 연구에서 벗어나 ‘세계’를 하나의 단위로 하는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소위 ‘신(新) 세계사’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는 이 같은 경향은 중앙유라시아의 세계사적 의미에 대한 근본적 재평가를 요구하고 있다.
더 이상 ‘변방의 역사’ 아니다
예를 들어 제리 벤틀리(Jerry H. Bentley)와 같은 학자는 기원후 500년에서 1500년까지의 1000년을 ‘유라시아적 통합’이 이루어지던 시기였고, 특히 1000~1500년의 기간은 ‘초(超)지역적 유목제국’이 주도하던 시대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서구에 의한 소위 ‘근대적 세계체제’가 성립되기 이전에 이미 유목제국에 의해 구대륙의 통합이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말이다. 이 같은 통합은 기존의 ‘실크로드’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보다 근본적이고 다양한 형태의 정치·경제·문화적 교류와 융합이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뿐만 아니라 중앙유라시아는 ‘세계사’의 지나온 궤적을 이해하는 데 매우 긴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더 이상 ‘변방의 역사’로 치부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시사하고 있다.
그런데 이처럼 중앙유라시아의 중요성에 대한 재인식은 우리 민족의 과거를 올바로 이해하고 미래에 대한 비전을 세우는 데도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21세기 인류의 역사는 엄청난 변화를 예고하고 있고 그 격랑 속에서 우리는 새로운 세계관과 가치관의 정립을 요청 받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지혜를 어디에서 얻을 수 있겠는가. 작금의 상황을 돌이켜보면, 지난 몇 세기 동안 확고부동하던 ‘서양’의 절대적 우위는 흔들리는 반면 이슬람의 도전과 중국의 부상(浮上)이 시작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변화가 어떻게 가능하게 되었으며 장차 세계사의 흐름에서 어떠한 의미를 갖겠는가 하는 의문에 대한 해답을 구하기 위해 국제 학술계에서는 치열한 지적 모색이 진행 중이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우리나라에서 유행되다시피 한 서구중심적 관점에 대한 비판은 카타르시스를 위한 심리적 효과나 독자의 호응을 기대하는 상업적 효과는 있을지 모르겠으나 그 이상의 건설적 대안이 되기는 어렵다.
지구촌은 머지않아 ‘다(多)중심체제’의 시대로 진입할 것이다. 얼마나 많은 ‘중심’들이 형성될지는 두고볼 일이지만, 현재로서는 구미권·이슬람권·중화권과 같은 커다란 블록이 예상된다. 물론 인도나 중남미 같은 변수도 존재할 것이다. 아무튼 문제는 우리 한국이다. 개항 이후 지금까지 우리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쳐온 서구의 문명·과학·이념을 비판하고 거부한다고 해서 중국 중심의 세계관으로 회귀할 수도 없는 문제이다. 이슬람은 우리에게 하나의 패러다임이긴 하지만 우리의 것으로 수용하기는 어려운 실체이다.
우리 민족 역사와도 깊은 연관성
그런 의미에서 필자는 ‘역사기행’에서 중앙유라시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통해서 21세기를 맞아 우리의 정체성에 대해서 성찰하고 미래를 위한 새로운 비전을 형성하는 데 작으나마 기여하고 싶었다. 왜냐하면 중앙유라시아는 세계사의 전개에 중요한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적어도 지난 2000년 동안 한반도와 그 주민에게 막대한 영향을 미쳐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동안 우리는 한민족의 독자성과 지속성을 강조하기 위해 한반도와 중앙유라시아, 즉 역사적 ‘남북관계’를 항상 대립적인 것으로 서술해왔다. 그래서 북방 ‘오랑캐’와의 항쟁을 강조해왔고, 몽골의 지배를 받던 고려시대는 외세에 굴복한 수치스러운 역사의 일부인 것처럼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돌아보면 ‘남북관계’는 대립에서 융합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내용의 접촉과 교류를 포괄하는 관계였다. 우리의 언어·풍속·제도·종교 등 여러 방면에서 우리는 그 영향을 받아왔다. 한반도는 한편으로는 바다를 향해 열려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중앙유라시아를 향해 열려 있었고, 북방의 채널을 통해 그곳의 문물이 끊임없이 흘러들어온 것이다.
필자는 지금이야말로 중앙유라시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절실하게 필요한 때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세계사의 지난 궤적을 이해하고 현재의 국제적 상황의 원천을 올바로 파악하는 데 긴요할 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의 역사적 정체성과 미래 비전을 확보하기 위해서도 필수적 요소이기 때문이다. 그 동안 우리 역사는 지나칠 정도로 ‘중국중심’ 혹은‘민족중심’으로 해석되어왔다. 중앙유라시아와의 연관성은 한낱 에피소드로 치부되었지 우리 역사에 중요한 요소로 인식되지는 못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편견을 벗어버려야 할 때다. 한반도가 지리적으로 만주와 몽골을 거쳐 대륙으로 연결되어 있듯 우리의 역사도 중앙유라시아와의 심층적이고 광범위한 연관성 속에서 전개되고 발전되어왔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때가 온 것이다.
/ 김호동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hdkim@snu.ac.kr
주간조선 [1984호] 2007.1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