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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달라이 라마 자서전「유배된 자유 (Freedom In Exile)」[2]

chomice 2008. 1. 2. 16:09
제3장 - 침략, 몰아치는 폭풍

1950년 여름 가극 축제가 열리기 전날 노르불링카 욕실에서 막 나오는데 발 밑의 땅이 움직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처음엔 지진이 일어난 것으로 생각했다......바로 그때 먼 곳에서 폭발음이 크게 들려왔다......하늘을 쳐다보고 있을 때 또 폭음이 들렸다. 폭음은 계속되었다. 땅의 진동과 폭음으로 보아 대포 소리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했다......다음날 우리는 그 소리가 사격 소리가 아니라, 일종의 자연현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폭음이 났던 쪽 하늘에서 붉은 섬광을 보았다고 했다. 이런 현상을 티벳 전역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경험하였다는 사실이 차차 밝혀졌다......이렇게 이상한 사건의 규모가 드러나게 되자 이번 일이 단순한 지진이 아니라는 생각들을 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은 뭔가 불길한 조짐이었다......어쨌든 그것이 천상의 계시이건 지각의 변동이건 그 일이 있고부터 티벳의 정세는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63~64)

재난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라사도 함락될 것이었다. 우리는 그들의 맹공을 막아낼 재간이 없었다. 티벳 군대는 인력이 부족한데다가 티벳 군대는 현대식 무기도 별로 없었으며, 훈련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다. 섭정 기간 내내 군대에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이다. 티벳도 다른 나라를 침략한 역사가 있긴 하지만 우리 민족은 근본적으로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고, 군에 복무하는 것을 천시해 왔었다. 군인은 백정과 비슷하게 취급당했다. 예비군 몇 개 연대가 티벳 내의 여기저기서 비상소집되고, 정규 연대병력도 새로 창설되었지만, 전선에 배치된 군대의 전투력은 보잘것 없었다. (65)

겨울이 되자 상황은 더욱 불리해졌다. 그때, 달라이 라마의 성년식을 치르자는 논의가 일기 시작했다. 국민들은 두 해나 일찍 서둘러 달라이 라마에게 세속적 정권을 완전히 부여하기를 바랐다......여론은 두 가지로 갈려있었다. 하나는 이러한 국가적 위기에 내가 지도력을 발휘하기를 바라는 쪽이고, 다른 하나는 그런 중대한 책임을 떠맡기엔 내가 너무 어리다고 생각하는 쪽이었다. 나 자신은 후자 편이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내 의견은 무시되었다. 그 대신 정부 당국은 이 결정을 신탁에 위임했다. 그것은 매우 긴장된 순간이었다. 신탁의 마지막 순간 쿠텐은, 의식에 쓰는 거대한 머리 덮개의 무게로 비틀거리며 내가 앉아있는 곳으로 다가와, 카타(제물을 바칠 때 쓰는 비단보자기)를 내 무릎에 놓으면서 “툴-라 밥”하고 외쳤다. 이 말은 ‘그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뜻이다.
도르제 드라크덴이 이렇게 선언하자 타탁 린포체는 곧바로 섭정직에서 물러날 채비를 갖추었다......한 달 전만해도 가극 축제나 기다리는 철부지였는데 전쟁을 치르고 있는 나라를 통치하는 지도자의 역할을 곧 떠맡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돌이켜보건대 나는 그때 놀라지 말았어야 했다. 지난 몇 년 동안 신탁은 정부에 대해선 노골적인 경멸을 드러냈지만 나한테만은 지극히 공손했었다.  (66~67)

만약 내가 거절하면 형은 나를 죽여야만 한다. 그러면 그들은 형에게 포상할 것이었다. 그것은 괴상한 제안이었다. 무엇보다도 살아있는 생명을 죽인다는 것은 불교도에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사리사욕을 위해 달라이 라마를 암살하라는 제안을 한 것을 보면 중국인들이 티벳인들의 국민성을 거의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67)

붓다는 일체의 살생을 금하였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는 살인이 정당화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형은 현재상황이 바로 그런 경우라고 믿는 듯 했다. 따라서 그는 수도자로서의 서약을 포기하고, 승복을 벗고 티벳의 밀사로 외국으로 나가겠다고 했다. 그는 미국과 교섭을 해볼 생각이었다. 형 생각엔 미국 사람들이 티벳의 자유를 지지해줄 것 같다는 것이었다. (68)

나는 그들(점성술사들)을 별로 신임하지 않았었지만, 그런 일로 더욱 그들을 탐탁찮게 여기게 되었다. 나는 사람의 일생 중 가장 중요한 날(출생이나 사망과 같은)이 점성술사들에 의해 결정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 밖의 인생사에 있어서도 점성술사들의 견해가 존중되어야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그건 내 생각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렇다고 해서 티벳인들이 점성술을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점성술은 우리 티벳 문화에서는 무척 소중한 것이다. (69)

의식이 너무도 길고 복잡해서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두려움에 싸였다. 마침내 식이 끝났을 때, 나는 전면전의 위협에 직면한 연약한 티벳 국민의 지도자가 되었다는 명백한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내 나이 겨우 열다섯이었다.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인 듯했다. 그러나 가능하기만 하다면, 이 재난을 막는 것이 나의 의무라는 것을 납득했다. (70)


제4장 - 남부에서의 피난생활

드로모까지의 여행이 내게 일깨워준 것은 열심히 공부하고 가능한 한 많이 배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우리 국민들의 충정에 보답하는 길은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고로 훌륭한 인물이 되는 것이었다. (76)

매일 아침 나는 베이징 라디오 방송국의 티벳어 방송을 들었다. 때로는 관리 한 두 사람이 나와 함께 듣기도 했지만 대개는 혼자서 들었다. 방송 내용은 ‘영광스러운 조국’에 관한 선전 일색이었다. 그러나 나는 대부분의 방송을 상당히 감명깊게 들었다고 할 수 있다. 방송은 시종 중국의 산업발전과 인민평등에 관한 것이었다. 그것은 정신적 진보와 물질적 진보의 완전한 조화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어느 날 저녁 혼자 있는데 매우 색다른 방송이 들려왔다......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나는 거짓말과 진부한 수사가 그토록 교묘히 섞인 발표를 듣고 전신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79)

티벳은 한번도 중국의 속국이 된 적이 없었다. 오히려 우리가 옛 티벳 영토를 돌려줄 것을 중국측에 요구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무엇보다도 중국과 티벳은 인종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전혀 다르다. 우리는 언어도 서로 다르며 문자도 서로 다르다. 국제사법위원회의 보고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12년 중국 세력을 축출한 티벳은 사실상의 독립국으로 인정되는 것이 정당하다. 그러므로 티벳은 1911~1912년에 사실에 있어서나 중국의 법에 의해서나, 독립된 주권국가로 재수립된 것으로 본다. (80)

때문에 나는 진퇴양난의 상황에 처하였다. 큰형의 권유에 따르게 된다면 외국의 원조를 받을 수 있는 길이 생기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이 문제에 대해 심사숙고한 끝에 두 가지 중대한 결론에 도달했다. 첫째, 미국이나 또 다른 나라들과 조약이 체결될 경우, 그 결과는 전쟁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은 명백했다. 그리고 전쟁은 피를 흘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둘째, 미국은 강대국이긴 하지만 수백 킬로미터 밖에 있다. 반면에 중국은 바로 인접해 있으며 물자에 있어서는 미국에 뒤질지는 모르나 병력에 있어서는 미국보다 유리할 것이 분명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 문제를 무력으로 해결하려면 여러 해가 걸릴 것이다......그 동안에 티벳, 중국, 미국, 어느 나라 할 것 없이 무수한 인명의 손실이 따르게 될 것이다. 따라서 나는 가장 바람직한 길은 중국 장군의 도착을 앉아서 기다리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어쨌든 그도 사람일테니까. (82)

1951년 6월 16일 중국대표단이 드로모에 도착했다. 전령이 그들의 도착을 알리기 위해 사원으로 뛰어왔다. 이 소식을 듣고 나는 한편으론 몹시 흥분했고 한편으론 걱정이 앞섰다. 그 사람들은 어떻게 생겼을까? 나는 그들은 머리에 뿔이 달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그들의 첫인상은 내가 우려했던 것보다 나았다. 내가 그들을 만나기 전에 했던 의심과 걱정에도 불구하고 회합을 하는 동안, 이 사람이 비록 적이 될지는 모르지만 그 역시 인간이며 나와 같은 보통사람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을 수 있었다. 이 깨달음은 아직 충격으로 남아있다. 그것은 또 하나의 중요한 교훈이었다. (83)

나는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건 간에 종교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 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때는 연설 솜씨가 시원찮았다. 연설할 때마다 조금씩 나아지기는 했지만 자신감이 없었다. 그리고 나는 모든 교사들이 그러하듯 배우기 위해서는 가르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84)

나는 그(타탁 린포체)와 함께 가게 된 것이 몹시 즐거웠다. 그는 무척 친절한 사람이었을 뿐만 아니라 높은 경지를 체득한 영적 스승이었다. 그는 말할 것도 없이 나의 가장 중요한 스승이었다. 그는 많은 경전과 은밀한 가르침을 내게 최초로 전수해 준 사람이다. 그 또한 그러한 가르침을 훌륭한 스승한테서 전수받았다. (84)

나는 불교 신자이기에 그의 죽음을 그다지 슬퍼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노르부 톤둡의 죽음이 나의 유년기를 상징적으로 끝막음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시는 그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며칠 후 나는 중국 대표단과 회합을 갖기로 되어 있었다. 나는 나의 국민들을 위해서 별일 아니더라도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나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종교적인 탐구라는 것을 항상 마음에 새기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아직 열여섯 살 먹은 소년에 지나지 않았다. (87)

1951~1952년 겨울 내내 나는 평소와 다름없이 열심히 공부를 했다. 어쩌면 평소보다 더 열심히 했는지도 모른다. 내가 람 림 명상을 시작하게 된 것도 이 시기이다. 이 명상은 영적 수련을 통해 점진적으로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설명한 경전에 의거한 명상법이었다. 내가 여덟 살쯤 되었을 때 사원의 교과과정에 들어있는 탄트라Tantra의 가르침을 받기 시작했었는데, 이 람 림 명상도 그와 유사한 것이다. 이러한 가르침은 경전 이외에도 비법 전수자를 통해 비의적으로 전수된다. 몇 개월이 지나자 어느 정도 발전이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미세하나마 영적 계발의 토대가 자리잡혀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90)

루캉와는 아직 젊긴 했지만 심지가 굳은 사람이었다. 그는 지앙(장진우) 장군에 대한 감정을 한번도 숨기려 하지 않았다......지앙은 조용히 듣고 있다가 말했다. “그렇다면 앞으로 티벳 국기 대신 중국 국기를 게양하는 것으로 문제를 일단 매듭지읍시다.” 그러자 루캉와가 그 말을 받았다. “만약 장군께서 그런 짓을 한다면 국기를 끌어내려 불을 질러버리겠소. 그렇게 되면 아마 당신네 나라에도 좋은 게 하나도 없을 겁니다.” 그는 계속해서 이미 티벳의 존엄성을 모독한 중국이 티벳과 우호관계를 맺으려고 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수작이라고 공격했다. “당신네는 이미 한 사람의 두개골을 깨버린 셈인데, 아직 그 두개골이 치유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 사람과 친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시오?” 얘기가 여기까지 이르자 지앙 장군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회의장을 나갔다. (93)

판첸 라마가 라사에 도착한 때는 그즈음이었다. 불행하게도 그는 중국인들의 주목을 받게 되어 이제야 자신의 정당한 지위로 복귀할 요량으로 타쉴훈포 사원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는 암도 지방에서 라사에 들어올 당시, 자기 가족, 교사들과 더불어 상당수의 중국군들(사실은 그의 경호원들)을 동반하고 있었다.
그가 도착한 직후 나는 그와 공식적인 회합에 이어서 포탈라에서 사적인 만찬을 가졌다. 내 기억에 의하면 그는 아주 강압적인 중국인 비서를 대동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비서가 우리가 대좌한 자리에까지 끼어들려고 하자 내 (의전)근위대들이 그를 제지하려고 하였다. 결국 나는 못볼 꼴을 봐야만 했다. 그는 무장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드디어 나는 판첸 라마와 둘만의 시간을 갖게 되었다. 나는 그가 아주 정직하고 믿을만한 젊은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는 나보다 세 살이나 어린 데다 아직 어떠한 권력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순수했으며 아주 낙천적이고 명랑한 사람이었다. 나는 그에게 친근함을 느꼈다. 그러나 그때는 아무도 그 앞에 놓여있는 비극적인 삶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94~95)

나는 타탁 사원에 초대되어서 아주 정성스럽고 철저하게 축성(祝聖)하였다. 의식은 열다섯 시간이나 계속되었으며 나의 구루(스승)를 위한 스투파(기념탑)가 봉헌되었다 그 앞에 부복할 때는 슬픔이 복받쳤다. 얼마 후 나는 암울한 현실에서 벗어나 가까운 주변 산자락으로 소풍을 나갔다. 이 소풍에서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화장을 했던 타탁 린포체의 해골이 눈앞에 나타났던 것이다. 해골 위에는 그의 수호신을 나타내는 티벳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실제로 이런 신비한 현상은 고승들에겐 흔한 일이었다. 뼈가 형상이나 문자를 나타낼 수 있게 기묘하게 녹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나의 전임 달라이 라마와 같이 육신에 어떤 형태가 선명하게 나타나는 수도 있다. (95)

전수의식은 한 달 간의 안거기를 가진 후 거행되었다. 그 의식은 링 린포체는 물론 나에게도 매우 드물고 감동적인 경험이었다. 나는 높은 경지를 이룬 영적 스승들에 의해 무한한 세월을 거쳐 전해진 전통의 한가운데 서게 된 것을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했다. 봉헌기도의 마지막 구절을 낭송하며 나는 너무나 감동되어서 숨이 막혔다. 그 당시엔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그것 역시 좋은 징조인 것 같았다. 지금 생각엔 그것이 내가 선대의 달라이 라마 중 어느 누구보다도, 그리고 다른 어떤 사람보다도 칼라차크라를 많이 전수해 주게 될 것을 예고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97~98)

그때 나는 친구와 적에 대한 붓다의 교훈을 마음에 새겨두고 있었다. ‘적이라고 생각되는 사람은 친구보다도 소중하다. 왜냐하면 적은 너에게 친구가 가르칠 수 없는 그 어떤 것, 예컨대 인내 같은 것을 가르쳐준다.’ 붓다의 이 교훈에 나는 다음과 같은 나의 신념을 덧붙였다. ‘아무리 불운한 일도 결국은 차차 좋아질 것이다. 사람들 가슴 속에 본래부터 깃들여 있는 진리와 정의, 그리고 인간적 이해에 대한 열망은 결국 무지와 절망을 딛고 승리할 것이다. 그러므로 중국인들이 우리를 탄압한다 해도, 그것은 결국 우리 티벳인들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줄 뿐이다.’ (99)
출처 : 박근형의 티베트 사천 자료실
글쓴이 : berdl28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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