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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달라이 라마 자서전「유배된 자유 (Freedom In Exile)」[1]

chomice 2008. 1. 2. 16:09

「 유배된 자유 (Freedom in Exile) 」
정신세계사, 1991년.
심재룡 옮김.

머리말

사람들은 ‘달라이 라마’라는 이름에 저마다 다른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 같다. 어떤 사람들은 달라이 라마를 자비의 보살인 관세음보살의 현신이라 생각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달라이 라마를 ‘세속적인 왕’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1950년대 후반에는 전국인민대표자대회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이라는 직함이 곧 달라이 라마를 뜻하기도 했다. 내가 인도로 탈출한 후에는 반혁명분자 혹은 인민의 기생충이라 불렸다. 그러나 내 생각은 이와 다르다. 내게 있어서 달라이 라마는, 내가 담당한 직책을 가리키는 칭호일 따름이다. 나는 그저 승려의 길을 걷기로 작정한 한 티벳인일 뿐이다.
지금부터 쓰려는 이 글은 한 승려로 살아온 나의 생애에 대한 기록이다. 그러나 이 글은 결코 불교에 관한 내용이 아니다. 내가 이 책을 쓰는 데는 두 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다. 우선은 갈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달라이 라마에 대해 뭔가를 알고 싶어하기 때문이며, 그 다음 이유로는, 내 손으로 직접 정확하게 기록해 놓고 싶은 역사적 사건이 많기 때문이다.
시간이 없어서 이 이야기를 직접 영어로 쓰기로 하였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영어로는 언어구사력에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내 얘기가 함축하고 있는 미묘한 의미들 중의 일부가 내 의도와는 달리 엉뚱하게 잘못 이해될 소지가 있으리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내가 티벳어로 이 글을 쓴다해도, 어차피 다른 언어로 번역되어야 한다면, 다른 언어로 글을 쓰는 거나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 글을 쓰면서 몇몇 사람이 갖고 있는 한정된 조사자료를 내 임의로 썼다는 점과,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내 기억 역시 틀릴 수 있다는 점을 덧붙여두고 싶다. 끝으로 티벳 망명정부의 당국자들과, 여러모로 은혜를 베풀어준 노만 알렉산더 씨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1990년 5월 다람살라에서)


제1장 - 흰 연꽃을 든 보살

옛날을 생각할 때마다 어쩔 수 없는 슬픔에 잠기게 된다. 과거를 회상한다는 것은 곧 내 동포들의 엄청난 고통에 대한 회상에 다름 아니다. 물론 예전의 티벳이 완벽한 나라였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풍속에는 상당히 훌륭한 점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우리는 보존할 가치가 있는 많은 것들을 이젠 영영 잃어버리고 말았다. (9)

사람에 따라 달라이 라마라는 칭호에 대한 이미지가 제각기 다르겠지만, 내게 있어서는 그 칭호가 나의 신성한 직책을 환기시켜줄 따름이라는 얘기는 이미 하였다......티벳 불교는 다시 태어나는 방식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몇몇 특수한 존재만을 인정할 뿐인데, 달라이 라마도 그러한 존재일 따름이다. 티벳에서는 이러한 존재를 ‘툴쿠(化身)’라 한다. (10)

우리집엔 여느 집들과 달리 처마에 물받이가 있었다. 노간주 나무 가지로 만든 그 물받이는 빗물을 받아내리기 위해 가운데에 홈을 파놓았다. (14)

내가 태어날 당시에 있었던, 아버지에 관한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그때 아버지는 몇 주일 동안 침대에서 꼼짝 못하고 앓아누워 계셨는데, 아무도 그 병의 원인을 알 수 없어서 돌아가시기만을 기다리는 형편이었다. 그렇게 앓던 분이 내가 태어난 날 갑자기 회복되셨다. 그 이유는 누구도 알 수 없었다. (15)

물론 내가 보통 아이와 다르게 되리라는 생각 [달라이 라마가 되리라는 생각]은 아무도 하지 못했으리라. 한 가정에 화신이 둘이나 탄생한다는 것은 거의 기대할 수 없는 일이었고, 우리 부모님 역시 내가 후에 달라이 라마라 불리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아버지가 병환에서 갑자기 회복된 것은 길조임에 틀림없었으나 누구도 그것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나 역시 내 미래에 대해 특별한 암시를 가진 적이 없었다. 내 어렸을 때의 기억은 평범한 것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최초의 기억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만 나는 그렇진 않는다.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는 편을 갈라  싸움질하는 아이들을 보고 약한 쪽에 힘을 보태주려고 달려갔던 기억, 그리고 처음으로 낙타를 보았던 기억이 있다.(16)  

특히 재미있었던 어린 시절의 추억은......또 하나 내가 좋아한 놀이는 먼 여행을 떠나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가방에 잠을 꾸리는 일이었다. 이것은 내가 언제나 식탁의 상석에 앉으려고 고집을 부린 사실과 함께, 나 스스로 후에 큰 인물이 되리라는 것을 일찍부터 알 있었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사례라고 사람들은 말하곤 했다. 나는 어렸을 때 나의 미래에 관련된 것으로 생각되는 꿈을 여러 번 꾼 적이 있다. 그러나 그때 내가 나 자신의 미래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는 없다. 나중에 어머니는 내가 보통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 주었던 것 같은 몇 가지 사례를 내게 얘기한 적이 있다. 그 사례라는 것은 내 밥그릇을 어머니 외엔 누구도 만지지 못하게 했다든가, 낯선 사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든가 하는 것 따위이다. (17)

불교의 근본개념은 [현상계의 여러 가지 사물들이 서로 의존해서 생긴다고 하는] 연기(緣起)와 인과(因果)의 법칙이다. 이것은 간단히 말해서 사람이 경험하는 것은 모두 동기가 있는 행위에서 비롯된다고 보는 법칙이다. 그러므로 동기는 행위와 경험의 뿌리이다. 이러한 인식으로부터 ‘의식(意識)’과 ‘윤회’에 대한 불교적 이론이 구축된다.
우선 의식에 대해서 말하자면, 원인이 결과를 낳고 그 결과가 다시 원인이 되어 또 결과를 낳기 때문에 의식은 연속된다고 본다. 의식은 한순간에서 그 다음 순간으로 흘러가면서 경험과 인상을 축적한다. 육체의 죽음에 이른 한 개체의 의식에는 과거의 모든 경험과 인상이 각인되어 있으며, 그것에 선행하는 행위 또한 그 의식에 내포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행위(行爲)’라는 의미를 가진 카르마Karma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몸-동물이나 사람, 혹은 신의 몸-에 ‘다시 태어나’게 되는 것은 카르마를 수반하는 의식이다. (18)

불교도들은 의식이란 본래 중립적인 것이기 때문에, 존재자인 한 회피할 수 없는 삶, 고통, 죽음, 그리고 윤회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러한 해탈은 오로지, 나쁜 카르마를 제거하고 세속적 집착에서 벗어날 때라야만 가능하다고 한다. 이러한 경지에 도달해야만 비로소 의식은 자유로워지고, 궁극적으로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깨달음을 얻은 존재는, 티벳 불교의 전통에 따르면, ‘윤회’, 즉 삼사라Samsara로부터 자유로워져서 존재자의 실상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에 고통 받는 중생들이 모두 고통에서 벗어나게 될 때까지 그들을 돕기 위해 다시 이 세상에 태어나게 된다. (19)

나는 앞서간 열세 명의 달라이 라마(제1대 달라이 라마는 서기 1351년에 태어났다)의 화신으로 여겨진다. 달라이 라마는 범어로는 아발로키테쉬바라Avalokiteshvara라 하고, 티벳어로는 첸레직Chenrezig이라 하는 관세음보살, 즉 흰 연꽃을 든 보살의 화신이다. 실제로 붓다 샤카무니 당시에 살았던 한 브라만 소년에까지 소급하면 나는 74대째가 된다. 이러한 것을 진짜로 믿고 있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가 종종 있다. 여기에 대해선 대답이 간단하지 않다. 그러나 이제 쉰 여섯이라는 나이를 먹고 이생에서의 경험을 돌이켜보거나, 또 내 개인적인 종교체험에서 볼 때, 나보다 앞서간 열 세 명의 달라이 라마와 첸레직, 그리고 붓다가 나와 영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믿음은 어렵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다. (19)

내가 만 세 살이 되기도 전에 달라이 라마의 환생을 찾기 외해 정부가 보낸 일단의 관리들이 쿰붐 사원에 도착했다. 그들은 몇 가지 조짐을 보고 그리고 오게 된 것이었다. 그 조짐들 중 하나는 13대 달라이 라마인 툽텐 갸초의 시신에 관련된 것이었다. 13대 달라이 라마는 1933년에 쉰 일곱을 일기로 돌아갔는데, 국무회의가 열리는 동안에 남쪽으로 향해있던 시신의 머리가 북동쪽으로 돌려진 것이 발견되었다. 그 바로 직후 고위 라마승인 섭정이 환상을 보았다. 섭정은 남부 티벳에 있는 신성한 호수 라모이 라초의 물을 바라보고 있던 중에 티벳문자 Ah와 Ka, 그리고 Ma자가 물 위에 떠 있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그리고 청록색과 황금색으로 된 지붕을 이고 있는 3층 사원과, 그 사원에서 언덕으로 이어지는 좁다란 길이 보였다. 그리고 마지막엔 이상한 모양을 한 빗물받이 홈통이 있는 조그마한 집을 보았다. 그는 Ah가 북동 지방인 암도를 가리키는 것임을 확신하였다. 그래서 파견단을 그리고 보내게 된 것이다.
파견단은 쿰붐에 도착해서는 제대로 찾아왔다는 것을 느꼈다. Ah가 암도를 가리키는 것이라면 Ka는 쿰붐 사원을 가리키는 것이 틀림없겠기 때문이었다. 그 사원은 실제로 3층으로 되어 있었으며, 지붕은 청록색이었다. 이제 그들은 언덕과, 이상한 물받이가 있는 오두막을 찾아내어야 했다.......
......아기는 그를 알아보고 “세라 라마, 세라 라마”하고 소리쳤다. 세라는 규창 린포체가 있던 사원 이름이었다......이번에는 13대 달라이 라마가 쓰던 소지품들과, 그와 비슷하지만 13대 달라이 라마의 소지품이 아닌 물건들을 함께 가지고 왔다. 아기는 소지품이 앞에 놓일 때마다 “이건 내꺼야, 이건 내꺼야”하며 13대 달라이 라마의 소지품을 정확히 가려내었다......물론 나는 이 모든 일을 다 기억하진 못한다. 나는 너무 어렸었다. 단 하나 내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꿰뚫는 듯한 눈빛을 가진 한 사람뿐이다. 나중에 그의 이름이 켄랍 텐진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후에 나의 예복담당관이 되었으며, 내게 글 쓰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19~20)

거기에 도착한 후에 열린 축제는 내게 티벳 국민에 대한 영적 지도력을 부여한다는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축제는 온종일 계속되었다. 그때 기억도 흐릿하기는 하지만 비로소 진짜 내 집에 돌아왔다는 안도감을 느꼈었다. 사람들이 끝없이 몰려들었다.......누구에게 들어봐도 그때 나는 겨우 네 살 된 아이치고는 꽤 의젓했다고들 한다. 그것은 내가 진짜 달라이 라마의 환생인지 지켜보기 위해 온 한두 명의 최고위 승려의 눈에도 그러했던 것 같다. (23)


제2장 - 사자좌

티벳인들은 채소가 아닌 음식을 먹는 것에 대해 좀 까다롭다. 불교에서 육식을 절대 금지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동물이 식용으로 도살되어서는 안 된다고는 한다. 티벳에서는 고기를 먹는 것이 허용된다. 참파와 고기 외엔 먹을 것이라곤 거의 없기 때문에 그것은 매우 중대한 문제이다. 그러나 어떤 이유로든 짐승을 도살하는 행위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 (30)

나는 무엇이든 빨리 배웠음으로 근본적으로는 스승들과 사이좋게 지낼 수 있었다. 티벳에서도 ‘가장 뛰어난 학자’들의 지도를 받을 때 나 자신이 만족을 느낀다는 것을 깨닫고는 꽤 열심히 하려고도 했었다. 그러나 나는 단지 수업 받는 데 곤란을 당하지 않을 만큼만 열심이었다......어른이 되고 나서야 나는 내가 해야 할 공부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깨달았으며, 그 후로는 공부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요즘인 어린 날의 게으름을 후회하고, 하루에 적어도 네 시간 이상은 공부에 몰두하고 있다. (40)

난생 처음으로 그렇게 많은 교실과 좌석을 보고 적잖이 위축되었다. 그러나 어쩐지 두 사원 다 매우 낯이 익어서 전생에 와본 적이 있는 것 같은 확신이 들었다. (42)

그즈음에 타탁 린포체로부터 제5대 달라이 라마의 특별한 가르침을 받게 되었다. 그 가르침은 달라이 라마라면 누구에게나 특별한 의미가 있다. 그것은 환상을 통해 ‘제5대 큰 달라이 라마(당시 티벳인들에게 그는 이렇게 불렸다)’의 가르침을 받는 것이었다. 나는 그 뒤 몇 주일 동안 특이한 경험을 여러 번 했다. 특히 꿈을 통해서 여러 가지 가르침을 받았는데, 그때는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몰랐지만, 이제야 나는 그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43)

전임 달라이 라마(13대, 툽텐 갸초)에 대해 얼마간의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그는 영적으로 뛰어난 능력을 갖추었을 뿐 아니라, 세속적 지도자로서도 매우 유능했으며, 앞을 내다보는 비범한 통찰력을 가진 인물이었던 것 같다......나의 전임자는 현대 과학기술에도 관심이 지대했다......그의 정치적 통찰력 또한 비상한 바가 있었다. 죽기 전에 남긴 유언에서 그는 다음과 같은 경고를 잊지 않았다. 만약 근본적인 변혁이 없다면, “티벳의 종교적, 정치적 상황은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심각한 도전에 직면하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가 스스로 티벳을 지킬 수 없다면 달라이 라마와 판첸 라마들, 스승과 제자들, 그리고 모든 위대한 신앙의 수호자들은 사라지고 이름조차 기억되지 않을 것이다. 승려와 사원도 몰수될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적에게 봉사하게 될 것이며, 거지같이 전국을 떠돌아다니게 될 것이다. 모든 중생들은 크나큰 곤경에 처하여 공포에 떨게 될 것이다. 중생들은 날마다 계속되는 고통 속에서 신음하게 될 것이다.” (44~45)

달라이 라마인데도 내 부모님의 하인들은 나를 평범한 다른 꼬마들과 다름없이 대했다. 공식행사가 아닌 경우엔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특별대우 같은 걸 받지 않았으며, 누구든지 자신의 생각을 거침없이 내게 털어놓았다. 그래서 나는 아주 어린 나이에 이미 우리 국민들의 삶이 그렇게 안락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청소직 궁인들 역시 내게 그들 자신에 관한 얘기를 들려주었다. 그리고 고위 라마승들과 고관들이 자행한 비리와 불평등 사례에 대해서도 불평을 늘어놓았다. 그들은 또 그 당시에 일어난 시시콜콜한 사건에 대해서도 모두 얘기해 주었다. 이런 얘깃거리는 민중이 일할 때 부르는 민요의 소재가 되기도 한다. 나의 어린 시절이 때때로 너무 외로웠던 것은 사실이었고, 또 그나마 내가 열두 살이 되었을 때는 타탁 린포체가 부모님 집에 놀러 다니는 것조차 금했지만, 싯다르타 왕자나 중국의 마지막 황제 푸이의 어린 시절같이 삭막했던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나는 자라면서 재미있는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49~50)

출처 : 박근형의 티베트 사천 자료실
글쓴이 : berdl28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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