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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달라이 라마 자서전「티벳, 나의 조국이여(My Land and My People)」[3]
chomice
2008. 1. 2. 15:59
10. 라사의 위기
모든 정치적인 불행 속에서도 나의 종교적인 교육은 계속되었다. 그것은 여전히 나의 가장 큰 관심사였다. 가능하다면 평화 속에서 종교적인 공부를 추구하는 것이 내가 바라는 바였다......그 시험(변증법적 토론)은 실로 나뿐만 아니라 티벳 전체를 위해 대단히 중요한 행사였기 때문에, 나는 그 무렵 전적으로 종교적인 문제에 몰두되어 있었다. (129)
관례에 의하면 달라이 라마가 어디를 가든 항상 25명의 무장한 호위병이 그를 수행하였으며 항상 무장한 군인들이 길을 따라 배치되었었다......
......누구를 막론하고 중국인들의 초청을 의심스럽게 여기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어림잡아 그때 라사에는 10만 명 정도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으며 아마도 그것은 그때까지 이 도시가 수용했던 가장 많은 인구였을 것이다. (132)
중국사람들이 나를 납치하려는 계획을 세웠다는 소문이 즉시 전 도시에 퍼졌다. 3월 9일 저녁과 밤사이에 흥분과 소요가 점증했다. 그 다음날 아침이 될 무렵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떤 댓가를 치르더라도 내가 중국 병영을 방문하는 것을 막아야 된다고 자발적으로 결정해 버렸다......
......또한 사람들의 마음에 한층 더 어두운 의심을 일으키는 일이 있었다. 동부 지역의 서로 다른 네 곳에서 중국군 사령관들에 의해 파티에 초대되었던 고위 라마들이 다시는 보이지 않았다. 이것은 티벳 전역에 알려진 사실이었다. 세 명은 피살당했으며 한 명은 투옥되었다. 티벳인들을 보호해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있으면 사람들로부터 격리시켜버리는 것이 중국인들의 상투수법인 듯 했다. (133)
다음날은 라사에서는 그때까지 없었던 가장 중대한 날로 운명지워져 있었다. 정오에 나는 중국 병영으로 호위 없이 들어가는, 전례에 없던 일을 하도록 되어있었다. 그날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나는 그날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예측할 수 없었다. 나는 그런 걱정으로 잠을 설쳤다. 나는 5시에 일어나 보통 때처럼 불당으로 갔다. 모든 것은 잘 정돈되어 있었고 작은 금, 은의 잔들은 달콤하게 느껴지는 샤프론 향료의 일종으로 가득 차 있었으며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정원으로 나갔다. 그곳은 항상 이른 아침에 내가 산책을 즐겼던 곳이다.
처음에 나는 걱정에 사로잡혔으나 곧 봄날 아침의 아름다움에 그것들을 잊어버렸다......지붕 위의 기도 깃발들은 아침 산들바람에 움직여 휘날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내가 마지막으로 맛본 잠시동안의 마음의 평화였다. 공원 담 너머로부터 귀에 거슬리는 돌연한 고함소리에 의해 그 마음의 평화는 깨졌다......라사 시민들이 뛰쳐나와 노블링카를 에워싼 채 “달라이 라마를 보호하기 위해 왔으며, 중국인들은 나(달라이라마)를 중국 병영으로 데려가는 것을 중단하라”고 외치고 있다고 보고하였다. (134)
군중은 셀 수 없이 많았다. 어떤 사람들은 약 3만 명이 모였다고 했다. 그들은 난폭하리만큼 흥분했고 그 외침은 중국에 대항하는 격렬한 분노였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혼란은 증가되었다. 나는 기도하기 위해 작은 법당으로 들어갔는데 그 법당은 제 7대 달라이 라마가 악을 방어하는 첸레시의 무사적 상징인 마하칼라를 위해 지었던 곳이다. 그곳에는 여덟 명의 승려들이 며칠 동안 계속해서 기도하고 있었다. (135)
군중들은 이미 60명 내지 70명의 지도자를 위원으로 뽑았으며, 만일 중국 당국이 끝내 나를 데려가려 한다면 궁 밖에 방책을 치고 내가 끌려나가는 것을 저지하기로 맹세하였다. (136)
“중국은 물러가라, 티벳은 티벳 사람에게 맡겨라” 그들의 모든 주장은 중국의 점령과 달라이 라마의 정치권에 대한 간섭의 종식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 외침을 들으면서 나는 사람들의 정신적인 긴장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그들 중의 한 사람으로 태어났으며, 그들이 느끼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충분히 알고 있고 또 억제하기 어려운 그들 현재의 마음 상태도 잘 알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한 나의 인식은 그날 아침 늦게 파크팔라 켄충이라는 승단 관리가 성난 군중들에 의해 끌려다니다가 마침내는 돌에 맞아죽었다는 비참하고 슬픈 소식을 접하면서 다시 한 번 확인되었다. 그는 중국 점령군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던 사람이었다. 그는 그날 아침 일찍 수도승 관리들의 일일 집회인 트룽차 의식에 참석한 다음, 무슨 이유인지 11시 경에 중국 옷 비슷한 차림으로 검은 안경에다 오토바이 타는 사람들이 쓰는 먼지 방지용 마스크를 쓰고 허리춤엔 권총을 감춘 채 노블링카 쪽을 향하여 자전거를 타고 오고 있었다. 군중들 몇은 그를 변장한 중국인으로 보았으며, 다른 사람들은 그가 중국군 본부로부터 어떤 전갈을 가져오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중국의 모든 것에 대한 그들의 분노와 원한은 갑자기 폭발하였으며 살인은 그 비참한 결과였다. (136)
그날 아침의 정신적인 긴장은 티벳의 지도자로서 나의 짧은 기간 동안에 처음 겪은 경험이었다. 나는 마치 내가 언제 터질지 모르는 두 개의 화산 사이에 서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한편에는 중국의 지배에 반대하는 우리 국민의 격렬하고 명백하며 만장일치된 주장이 있었으며, 다른 한편에는 강력하고 공격적인 무력으로 무장된 점령군이 있었다. 만일 그 물이 충돌한다면, 그 결과는 뻔할 것이다. 수천 명의 라사 시민들이 무자비하게 대량학살될 것이고, 티벳의 전 지역은 박해와 학정의 전면적인 군사 통치를 받게 될 것이다.......그러나 동시에 나는 평화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나는 우리 국민들을 구하기 위하여 어떤 댓가를 치르더라도 군중들의 분노를 진정시켜야 했으며 또한 더욱 화가 치밀어 있을 중국인들을 달래야만 하였다. (137)
나는 폭력은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에 라사 시민들이 보여주었던 폭력적인 태도를 인정할 수 없었다고 다시 얘기할 수 있다. 나는 티벳의 상징인 나를 위해 보여준 시민들의 사랑에 감사할 수 있었고 지금도 그렇다. 그러나 시민들의 그러한 태도야말로 그 운명적인 날, 중국인에 대하여 시민들이 보여준 분노의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나는 나의 안전을 위한 그들의 충정에 대해서 그들을 비난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달라이 라마는 그들이 생활하고 일하기 위한 것 거의 전부를 대표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하고 있는 일이 계속된다면 그것은 단지 재난을 야기시킬 뿐이라는 것을 확신하였으며, 국가 원수로서 나는 중국 군대의 압박 아래서 그들 자신의 파멸을 가져올 일을 멈추고 그들의 감정을 돌리기 위하여 모든 수단을 다해 노력해야만 하였다. 그래서 내가 그들에게 준 충고는 충심에서 우러난 것이었으며, 비록 중국 장군에게 한 나의 편지가 나의 진실한 의사를 감추기 위하여 쓰여졌다 하더라도 나는 그 편지들이 정당화될 수 있다고 믿었으며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믿고 있다. (142)
군중들은 더욱 강경해졌고 궁전의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어떤 일이 있어도 궁전의 수비를 풀지 않을 것이라고 발표하였다......나는 그것이 재난을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기는 것임을 느꼈다. 그래서 나는 직접 군중의 지도자들과 이야기해야겠다고 결정하였다. 나는 그들을 불렀으며, 그들 70명 모두가 왔다......그들은 조용히 회의장을 떠났으며 궁전 문 밖에서 그들만의 회의를 열었다. 그들은 나의 명령에 불복종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라고 동의하였으나, 만일 그들이 철수한다면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에 대해 오랫동안 논의하였다......그들은 나를 계속 보호하고자 하였으며 중국은 라사와 티벳을 떠나 티벳인들이 자신의 일을 관리하도록 인정할 것을 고수하였다. (144)
즉 중국은 궁전과 군중을 파괴할 의도이며, 만일 그들이 할 수만 있다면 나를 죽이지 않고 그렇게 하기를 원하고 있었다. (145)
내가 중국인 병영에 간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것이었다. 나는 만일 그것이 우리 국민들의 대량학살을 방지할 수만 있다면 기꺼이 그곳에 가서 그들의 손에 나 스스로를 던지고 싶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결코 내가 그렇게 할 수 있게 허락하지 않았다. (148)
대답을 찾아야하고 결정을 내려야 할 사람은 나였다. 그러나 나의 세상사에 대한 무경험으로는 그것이 쉽지 않았다. 나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다. 나는 내가 중국측 공격의 희생물 중의 하나가 되는 것이 두렵지는 않았다. 나는 나의 엄격한 종교적 훈련이 어떤 불안도 없이 지금의 내 육신을 떠날 수 있는 충분한 용기를 나에게 주었다는 것을 정직하게 믿는다. 나는 그때 내가 항상 느끼고 있었던 것처럼, 나 자신은 하나의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지만 결코 사라지지 않는 윤회의 한 순환에 불과하므로, 나 자신의 육신적 종말은 중요하지 않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우리 국민들과 관리들은 나의 느낌을 함께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달라이 라마의 존재는 말할 수 없이 소중한 것이었다. 그들은 달라이 라마는 티벳을 대표하며 그 어떤 것보다도 소중한 티벳인의 삶을 대표한다고 믿고 있었다. 만일 나의 생명이 중국인들 손에 의해 사라지게 된다면, 티벳의 생명 또한 끝나게 되는 것이라고 그들은 확신하고 있었다.
그래서 죽음을 경고하는 듯한 중국군의 포성을 들었을 때, 궁내의 모든 관리들과 궁전 주위의 모든 사람들의 마음 속에 떠오른 첫 번째 생각은 나의 생명을 구해야만 하며, 내가 즉시 궁전과 도시로부터 떠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결정은 작은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커다란 모험이었으며 티벳의 미래 전체가 달려있는 문제였다......중국측의 무자비한 파괴와 대량학살이 시작되기 전에, 나를 도피시켜야 한다는 국민들의 열망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불확실하였다. 이것은 내가 결정을 내리는 데 있어 유일한 결정적인 길잡이였다. 만일 내가 머무르기로 결정한다면, 나는 나의 국민들과 가까운 친구들에게 불안을 더해주는 것이었다. 나는 가기로 결정하였다. 나는 내가 굳이 어떻게 해야 할까를 위해 기도하고 그에 대한 답을 받았다고 말할 필요는 거의 없다. (148~149)
그리고 그 어색한 옷차림으로 나는 마지막으로 나의 기도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평소에 사용하던 보좌에 앉아서 그 앞에 놓여있는 부처님의 경전을 펼쳤다. 그리고는 부처님께서 한 제자에게 용기있는 사람이 되라고 설법하신 구절에 이를 때까지 읽었다. 그리고나서 책을 덮고 그 방을 축복하였으며 램프를 껐다. 밖으로 나갔을 때, 내 마음의 모든 감정이 메말라버렸다. 나는 복도를 울리는 나 자신의 날카로운 걸음소리와 고요함 속에서 똑딱거리는 시계소리를 들었다. (151)
11. 탈출
노블링카를 떠나 이 흥분된 여행의 초기에만 해도 인도로 바로 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티벳 내의 어떤 지역에 머무를 수 있기를 바랬던 것이다. 어떻든 라사로부터 남서쪽을 통하여 인도로 향하는 두 개의 통상 루트를 택하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였다. 왜냐하면 그 길들은 중국인들이 이미 엄중히 감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라사로부터 남쪽과 남동쪽을 향해갔다. 그 방향은 중국군이 어떤 힘으로라도 침입하기 힘든, 길도 없는 광대한 산들이 있는 지역이었다......히말라야의 주요지역을 통과하는 험준한 산들의 심장부로부터 여러 갈래의 통로가 국경지방을 통과하게 되며, 부탄으로 내려가서 결국 인도에 이르게 된다. (155)
포격은 3월 20일 새벽 2시에 시작되었는데, 그것은 48시간 후였으며 중국인들이 내가 떠난 사실을 알아내기 전이었다. 그들은 그날 하루 종일 노블링카 궁전을 포격하였으며, 그 다음에는 시내, 포탈라 궁전, 사원 그리고 가까이에 있는 수도원으로 그들의 포를 돌렸다. 얼마나 많은 라사 시민들이 살육당하였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으나 수 천의 시체가 노블링카 안팎에서 발견되었다. 노블링카 궁전 안의 주요 건물들은 완전히 파괴되었으며 마하칼라 법당만이 기적적으로 남았을 뿐 다른 모든 건물들은 크고 작은 피해를 입었다. (159)
중국은 왜 그렇게 하였을까? 그들은 내가 그곳에 있다는 것을 믿으면서 노블링카를 파괴하였으니 나의 생사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음이 명백하였다. 살았든 죽었든 내가 거기에 없다는 것을 발견한 후에, 그들은 계속해서 수도원들을 포격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포격에 대항하여 단지 막대기나 칼 등 몇몇 간단한 무기로 무장했을 뿐 스스로를 보호하기도 불가능하였거나 중국군에 대해 어떤 물리적 손해도 입힐 수 없었던 수천 명의 사람들을 고의로 죽였다.
이 가증한 소식에 접한 우리는 이에 대한 단 한 가지 가능한 이유가 있음을 우리는 알았다. 우리나라를 침공한 지 8년이 지나서 중국은 우리가 그들의 통치를 결코 기꺼이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우리 국민들, 특히 부유하거나 지배층 사람들이 아니라 일반국민들이 중국인들에게 확신시켜준 것이었다. 그러므로 중국인들은 무자비한 살육으로 국민들을 공포에 떨게하고 마침내 그들의 통치를 받아들이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160)
12. 망명의 길로
우리의 자유와 문화, 종교를 지키기 위해 그들(캄파게릴라)이 시작한 불굴의 투쟁을 계속하려는 그들의 결심과 용기에 나는 깊이 감탄하였다. 나는 그들의 강함과 용기에,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나를 보호해준 데 대해 감사를 표하였다......정직하게 말해서 그 당시 나는 그들에게 폭력을 피하라고 충고할 수는 없었다. 싸우기 위하여 그들은 그들의 가정과 평화적인 삶의 모든 이로움과 안락함을 희생하였다. 이제 그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으며 계속해서 싸워야 했다. 나는 그들에게 아무 것도 제공할 수 없었다. 나는 단지 그들에게 산에서 그들의 위치를 방어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폭력을 사용하지 말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나는 중공군이 그들이 주둔하고 있는 산을 공격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라사로부터의 보고가 있으므로, 언제든지 필요하다고 생각될 때에는 나를 떠나 그들 자신의 방어를 위해 돌아가야 한다고 권고했다. (161~162)
우리가 악전고투의 여정을 계속하고 있는 동안 우리들 중의 누구도 우리의 탈출이 전 세계 신문의 머리기사가 되어있으며, 멀리 떨어진 유럽과 미국의 사람들까지 내가 안전한지를 알기 위하여 관심을 가지고 소식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비록 우리가 알고 있었다 하더라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떤 누구와도 통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곳에서 중국이 우리 정부를 해체시켰다고 발표했다는 소식을 들었으며, 그것은 중국인들의 만행에 우리가 행동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것이었다......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그것을 단순히 거절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임시정부를 설립하는 것이었다. (163)
어느 곳에든 우리가 산속에 머물러 있는 한 중국측은 우리들을 찾아낼 수 있으며, 거기에 내가 있는 것은 결국 더 많은 싸움을 일으켜 나를 보호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용감한 사람들의 죽음을 더욱 많이 가져올 것이라는 것이었다. 마침내 우리는 인도 정부에 망명처를 요청하는 서신을 가지고 한 발 앞서 국경으로 갈 관리들을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164)
국경 가까이 갈수록 우리의 여정은 더욱 더 어려워졌다......손가락과 손은 얼어서 감각을 잃었으며 눈썹은 얼어붙었다......여벌의 옷이 없었으므로 몸을 따뜻하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걷는 것이었다. 조랑말은 끌고가야 했다. 우리는 긴 여정을 통하여 가능한 조랑말의 도움을 받지 않으려고 하였다. 그것은 티벳인들이 항상 그렇게 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갈 길이 너무 멀고 조랑말에게 줄 먹이는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우리의 여행이 그렇게 오래 걸리고 다른 나라에 이는 우리의 친구들이 그렇게 오랫동안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몰라 궁금해했던 이유 중의 하나였다. (165)
그러나 우리는 악천 후에 시달려야 했다. 처음으로 우리는 천막 속에서 잤는데 비가 퍼붓기 시작하였다. 나의 천막에 비가 새어들어 세 시에 잠이 깬 나는 비가 새지 않는 곳으로 침대를 옮기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것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고 남은 시간을 꼬박 앉아서 지새워야만 했다. 다른 천막의 사람들도 같은 고통을 겪었다. 아침에 일어난 나는 몸이 좋지 않음을 느꼈다. 우리는 행진을 중단했다. 나는 말을 탈 수 없을 정도로 아팠으며 그날 중으로 병은 더욱 악화되었다......그래서 다음날 아침에 나는 몸을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두번째 날 아침에도 나는 여전히 너무 아파서 말을 탈 수가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호위를 맡은 캄파족들과 군인들의 책임을 덜어주기 위하여 움직여야만 한다고 생각하였다......국경을 넘을 때 극적인 사건은 없었다. 국경을 사이에 둔 양쪽 지역은 똑같이 황량한 무인지대였다. 나는 피곤하고 몽롱한 상태에서 표현할 수 없는 불행감으로 그 지역을 바라보았다. (167)
모든 정치적인 불행 속에서도 나의 종교적인 교육은 계속되었다. 그것은 여전히 나의 가장 큰 관심사였다. 가능하다면 평화 속에서 종교적인 공부를 추구하는 것이 내가 바라는 바였다......그 시험(변증법적 토론)은 실로 나뿐만 아니라 티벳 전체를 위해 대단히 중요한 행사였기 때문에, 나는 그 무렵 전적으로 종교적인 문제에 몰두되어 있었다. (129)
관례에 의하면 달라이 라마가 어디를 가든 항상 25명의 무장한 호위병이 그를 수행하였으며 항상 무장한 군인들이 길을 따라 배치되었었다......
......누구를 막론하고 중국인들의 초청을 의심스럽게 여기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어림잡아 그때 라사에는 10만 명 정도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으며 아마도 그것은 그때까지 이 도시가 수용했던 가장 많은 인구였을 것이다. (132)
중국사람들이 나를 납치하려는 계획을 세웠다는 소문이 즉시 전 도시에 퍼졌다. 3월 9일 저녁과 밤사이에 흥분과 소요가 점증했다. 그 다음날 아침이 될 무렵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떤 댓가를 치르더라도 내가 중국 병영을 방문하는 것을 막아야 된다고 자발적으로 결정해 버렸다......
......또한 사람들의 마음에 한층 더 어두운 의심을 일으키는 일이 있었다. 동부 지역의 서로 다른 네 곳에서 중국군 사령관들에 의해 파티에 초대되었던 고위 라마들이 다시는 보이지 않았다. 이것은 티벳 전역에 알려진 사실이었다. 세 명은 피살당했으며 한 명은 투옥되었다. 티벳인들을 보호해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있으면 사람들로부터 격리시켜버리는 것이 중국인들의 상투수법인 듯 했다. (133)
다음날은 라사에서는 그때까지 없었던 가장 중대한 날로 운명지워져 있었다. 정오에 나는 중국 병영으로 호위 없이 들어가는, 전례에 없던 일을 하도록 되어있었다. 그날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나는 그날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예측할 수 없었다. 나는 그런 걱정으로 잠을 설쳤다. 나는 5시에 일어나 보통 때처럼 불당으로 갔다. 모든 것은 잘 정돈되어 있었고 작은 금, 은의 잔들은 달콤하게 느껴지는 샤프론 향료의 일종으로 가득 차 있었으며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정원으로 나갔다. 그곳은 항상 이른 아침에 내가 산책을 즐겼던 곳이다.
처음에 나는 걱정에 사로잡혔으나 곧 봄날 아침의 아름다움에 그것들을 잊어버렸다......지붕 위의 기도 깃발들은 아침 산들바람에 움직여 휘날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내가 마지막으로 맛본 잠시동안의 마음의 평화였다. 공원 담 너머로부터 귀에 거슬리는 돌연한 고함소리에 의해 그 마음의 평화는 깨졌다......라사 시민들이 뛰쳐나와 노블링카를 에워싼 채 “달라이 라마를 보호하기 위해 왔으며, 중국인들은 나(달라이라마)를 중국 병영으로 데려가는 것을 중단하라”고 외치고 있다고 보고하였다. (134)
군중은 셀 수 없이 많았다. 어떤 사람들은 약 3만 명이 모였다고 했다. 그들은 난폭하리만큼 흥분했고 그 외침은 중국에 대항하는 격렬한 분노였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혼란은 증가되었다. 나는 기도하기 위해 작은 법당으로 들어갔는데 그 법당은 제 7대 달라이 라마가 악을 방어하는 첸레시의 무사적 상징인 마하칼라를 위해 지었던 곳이다. 그곳에는 여덟 명의 승려들이 며칠 동안 계속해서 기도하고 있었다. (135)
군중들은 이미 60명 내지 70명의 지도자를 위원으로 뽑았으며, 만일 중국 당국이 끝내 나를 데려가려 한다면 궁 밖에 방책을 치고 내가 끌려나가는 것을 저지하기로 맹세하였다. (136)
“중국은 물러가라, 티벳은 티벳 사람에게 맡겨라” 그들의 모든 주장은 중국의 점령과 달라이 라마의 정치권에 대한 간섭의 종식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 외침을 들으면서 나는 사람들의 정신적인 긴장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그들 중의 한 사람으로 태어났으며, 그들이 느끼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충분히 알고 있고 또 억제하기 어려운 그들 현재의 마음 상태도 잘 알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한 나의 인식은 그날 아침 늦게 파크팔라 켄충이라는 승단 관리가 성난 군중들에 의해 끌려다니다가 마침내는 돌에 맞아죽었다는 비참하고 슬픈 소식을 접하면서 다시 한 번 확인되었다. 그는 중국 점령군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던 사람이었다. 그는 그날 아침 일찍 수도승 관리들의 일일 집회인 트룽차 의식에 참석한 다음, 무슨 이유인지 11시 경에 중국 옷 비슷한 차림으로 검은 안경에다 오토바이 타는 사람들이 쓰는 먼지 방지용 마스크를 쓰고 허리춤엔 권총을 감춘 채 노블링카 쪽을 향하여 자전거를 타고 오고 있었다. 군중들 몇은 그를 변장한 중국인으로 보았으며, 다른 사람들은 그가 중국군 본부로부터 어떤 전갈을 가져오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중국의 모든 것에 대한 그들의 분노와 원한은 갑자기 폭발하였으며 살인은 그 비참한 결과였다. (136)
그날 아침의 정신적인 긴장은 티벳의 지도자로서 나의 짧은 기간 동안에 처음 겪은 경험이었다. 나는 마치 내가 언제 터질지 모르는 두 개의 화산 사이에 서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한편에는 중국의 지배에 반대하는 우리 국민의 격렬하고 명백하며 만장일치된 주장이 있었으며, 다른 한편에는 강력하고 공격적인 무력으로 무장된 점령군이 있었다. 만일 그 물이 충돌한다면, 그 결과는 뻔할 것이다. 수천 명의 라사 시민들이 무자비하게 대량학살될 것이고, 티벳의 전 지역은 박해와 학정의 전면적인 군사 통치를 받게 될 것이다.......그러나 동시에 나는 평화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나는 우리 국민들을 구하기 위하여 어떤 댓가를 치르더라도 군중들의 분노를 진정시켜야 했으며 또한 더욱 화가 치밀어 있을 중국인들을 달래야만 하였다. (137)
나는 폭력은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에 라사 시민들이 보여주었던 폭력적인 태도를 인정할 수 없었다고 다시 얘기할 수 있다. 나는 티벳의 상징인 나를 위해 보여준 시민들의 사랑에 감사할 수 있었고 지금도 그렇다. 그러나 시민들의 그러한 태도야말로 그 운명적인 날, 중국인에 대하여 시민들이 보여준 분노의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나는 나의 안전을 위한 그들의 충정에 대해서 그들을 비난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달라이 라마는 그들이 생활하고 일하기 위한 것 거의 전부를 대표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하고 있는 일이 계속된다면 그것은 단지 재난을 야기시킬 뿐이라는 것을 확신하였으며, 국가 원수로서 나는 중국 군대의 압박 아래서 그들 자신의 파멸을 가져올 일을 멈추고 그들의 감정을 돌리기 위하여 모든 수단을 다해 노력해야만 하였다. 그래서 내가 그들에게 준 충고는 충심에서 우러난 것이었으며, 비록 중국 장군에게 한 나의 편지가 나의 진실한 의사를 감추기 위하여 쓰여졌다 하더라도 나는 그 편지들이 정당화될 수 있다고 믿었으며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믿고 있다. (142)
군중들은 더욱 강경해졌고 궁전의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어떤 일이 있어도 궁전의 수비를 풀지 않을 것이라고 발표하였다......나는 그것이 재난을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기는 것임을 느꼈다. 그래서 나는 직접 군중의 지도자들과 이야기해야겠다고 결정하였다. 나는 그들을 불렀으며, 그들 70명 모두가 왔다......그들은 조용히 회의장을 떠났으며 궁전 문 밖에서 그들만의 회의를 열었다. 그들은 나의 명령에 불복종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라고 동의하였으나, 만일 그들이 철수한다면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에 대해 오랫동안 논의하였다......그들은 나를 계속 보호하고자 하였으며 중국은 라사와 티벳을 떠나 티벳인들이 자신의 일을 관리하도록 인정할 것을 고수하였다. (144)
즉 중국은 궁전과 군중을 파괴할 의도이며, 만일 그들이 할 수만 있다면 나를 죽이지 않고 그렇게 하기를 원하고 있었다. (145)
내가 중국인 병영에 간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것이었다. 나는 만일 그것이 우리 국민들의 대량학살을 방지할 수만 있다면 기꺼이 그곳에 가서 그들의 손에 나 스스로를 던지고 싶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결코 내가 그렇게 할 수 있게 허락하지 않았다. (148)
대답을 찾아야하고 결정을 내려야 할 사람은 나였다. 그러나 나의 세상사에 대한 무경험으로는 그것이 쉽지 않았다. 나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다. 나는 내가 중국측 공격의 희생물 중의 하나가 되는 것이 두렵지는 않았다. 나는 나의 엄격한 종교적 훈련이 어떤 불안도 없이 지금의 내 육신을 떠날 수 있는 충분한 용기를 나에게 주었다는 것을 정직하게 믿는다. 나는 그때 내가 항상 느끼고 있었던 것처럼, 나 자신은 하나의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지만 결코 사라지지 않는 윤회의 한 순환에 불과하므로, 나 자신의 육신적 종말은 중요하지 않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우리 국민들과 관리들은 나의 느낌을 함께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달라이 라마의 존재는 말할 수 없이 소중한 것이었다. 그들은 달라이 라마는 티벳을 대표하며 그 어떤 것보다도 소중한 티벳인의 삶을 대표한다고 믿고 있었다. 만일 나의 생명이 중국인들 손에 의해 사라지게 된다면, 티벳의 생명 또한 끝나게 되는 것이라고 그들은 확신하고 있었다.
그래서 죽음을 경고하는 듯한 중국군의 포성을 들었을 때, 궁내의 모든 관리들과 궁전 주위의 모든 사람들의 마음 속에 떠오른 첫 번째 생각은 나의 생명을 구해야만 하며, 내가 즉시 궁전과 도시로부터 떠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결정은 작은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커다란 모험이었으며 티벳의 미래 전체가 달려있는 문제였다......중국측의 무자비한 파괴와 대량학살이 시작되기 전에, 나를 도피시켜야 한다는 국민들의 열망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불확실하였다. 이것은 내가 결정을 내리는 데 있어 유일한 결정적인 길잡이였다. 만일 내가 머무르기로 결정한다면, 나는 나의 국민들과 가까운 친구들에게 불안을 더해주는 것이었다. 나는 가기로 결정하였다. 나는 내가 굳이 어떻게 해야 할까를 위해 기도하고 그에 대한 답을 받았다고 말할 필요는 거의 없다. (148~149)
그리고 그 어색한 옷차림으로 나는 마지막으로 나의 기도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평소에 사용하던 보좌에 앉아서 그 앞에 놓여있는 부처님의 경전을 펼쳤다. 그리고는 부처님께서 한 제자에게 용기있는 사람이 되라고 설법하신 구절에 이를 때까지 읽었다. 그리고나서 책을 덮고 그 방을 축복하였으며 램프를 껐다. 밖으로 나갔을 때, 내 마음의 모든 감정이 메말라버렸다. 나는 복도를 울리는 나 자신의 날카로운 걸음소리와 고요함 속에서 똑딱거리는 시계소리를 들었다. (151)
11. 탈출
노블링카를 떠나 이 흥분된 여행의 초기에만 해도 인도로 바로 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티벳 내의 어떤 지역에 머무를 수 있기를 바랬던 것이다. 어떻든 라사로부터 남서쪽을 통하여 인도로 향하는 두 개의 통상 루트를 택하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였다. 왜냐하면 그 길들은 중국인들이 이미 엄중히 감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라사로부터 남쪽과 남동쪽을 향해갔다. 그 방향은 중국군이 어떤 힘으로라도 침입하기 힘든, 길도 없는 광대한 산들이 있는 지역이었다......히말라야의 주요지역을 통과하는 험준한 산들의 심장부로부터 여러 갈래의 통로가 국경지방을 통과하게 되며, 부탄으로 내려가서 결국 인도에 이르게 된다. (155)
포격은 3월 20일 새벽 2시에 시작되었는데, 그것은 48시간 후였으며 중국인들이 내가 떠난 사실을 알아내기 전이었다. 그들은 그날 하루 종일 노블링카 궁전을 포격하였으며, 그 다음에는 시내, 포탈라 궁전, 사원 그리고 가까이에 있는 수도원으로 그들의 포를 돌렸다. 얼마나 많은 라사 시민들이 살육당하였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으나 수 천의 시체가 노블링카 안팎에서 발견되었다. 노블링카 궁전 안의 주요 건물들은 완전히 파괴되었으며 마하칼라 법당만이 기적적으로 남았을 뿐 다른 모든 건물들은 크고 작은 피해를 입었다. (159)
중국은 왜 그렇게 하였을까? 그들은 내가 그곳에 있다는 것을 믿으면서 노블링카를 파괴하였으니 나의 생사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음이 명백하였다. 살았든 죽었든 내가 거기에 없다는 것을 발견한 후에, 그들은 계속해서 수도원들을 포격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포격에 대항하여 단지 막대기나 칼 등 몇몇 간단한 무기로 무장했을 뿐 스스로를 보호하기도 불가능하였거나 중국군에 대해 어떤 물리적 손해도 입힐 수 없었던 수천 명의 사람들을 고의로 죽였다.
이 가증한 소식에 접한 우리는 이에 대한 단 한 가지 가능한 이유가 있음을 우리는 알았다. 우리나라를 침공한 지 8년이 지나서 중국은 우리가 그들의 통치를 결코 기꺼이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우리 국민들, 특히 부유하거나 지배층 사람들이 아니라 일반국민들이 중국인들에게 확신시켜준 것이었다. 그러므로 중국인들은 무자비한 살육으로 국민들을 공포에 떨게하고 마침내 그들의 통치를 받아들이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160)
12. 망명의 길로
우리의 자유와 문화, 종교를 지키기 위해 그들(캄파게릴라)이 시작한 불굴의 투쟁을 계속하려는 그들의 결심과 용기에 나는 깊이 감탄하였다. 나는 그들의 강함과 용기에,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나를 보호해준 데 대해 감사를 표하였다......정직하게 말해서 그 당시 나는 그들에게 폭력을 피하라고 충고할 수는 없었다. 싸우기 위하여 그들은 그들의 가정과 평화적인 삶의 모든 이로움과 안락함을 희생하였다. 이제 그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으며 계속해서 싸워야 했다. 나는 그들에게 아무 것도 제공할 수 없었다. 나는 단지 그들에게 산에서 그들의 위치를 방어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폭력을 사용하지 말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나는 중공군이 그들이 주둔하고 있는 산을 공격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라사로부터의 보고가 있으므로, 언제든지 필요하다고 생각될 때에는 나를 떠나 그들 자신의 방어를 위해 돌아가야 한다고 권고했다. (161~162)
우리가 악전고투의 여정을 계속하고 있는 동안 우리들 중의 누구도 우리의 탈출이 전 세계 신문의 머리기사가 되어있으며, 멀리 떨어진 유럽과 미국의 사람들까지 내가 안전한지를 알기 위하여 관심을 가지고 소식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비록 우리가 알고 있었다 하더라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떤 누구와도 통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곳에서 중국이 우리 정부를 해체시켰다고 발표했다는 소식을 들었으며, 그것은 중국인들의 만행에 우리가 행동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것이었다......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그것을 단순히 거절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임시정부를 설립하는 것이었다. (163)
어느 곳에든 우리가 산속에 머물러 있는 한 중국측은 우리들을 찾아낼 수 있으며, 거기에 내가 있는 것은 결국 더 많은 싸움을 일으켜 나를 보호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용감한 사람들의 죽음을 더욱 많이 가져올 것이라는 것이었다. 마침내 우리는 인도 정부에 망명처를 요청하는 서신을 가지고 한 발 앞서 국경으로 갈 관리들을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164)
국경 가까이 갈수록 우리의 여정은 더욱 더 어려워졌다......손가락과 손은 얼어서 감각을 잃었으며 눈썹은 얼어붙었다......여벌의 옷이 없었으므로 몸을 따뜻하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걷는 것이었다. 조랑말은 끌고가야 했다. 우리는 긴 여정을 통하여 가능한 조랑말의 도움을 받지 않으려고 하였다. 그것은 티벳인들이 항상 그렇게 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갈 길이 너무 멀고 조랑말에게 줄 먹이는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우리의 여행이 그렇게 오래 걸리고 다른 나라에 이는 우리의 친구들이 그렇게 오랫동안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몰라 궁금해했던 이유 중의 하나였다. (165)
그러나 우리는 악천 후에 시달려야 했다. 처음으로 우리는 천막 속에서 잤는데 비가 퍼붓기 시작하였다. 나의 천막에 비가 새어들어 세 시에 잠이 깬 나는 비가 새지 않는 곳으로 침대를 옮기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것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고 남은 시간을 꼬박 앉아서 지새워야만 했다. 다른 천막의 사람들도 같은 고통을 겪었다. 아침에 일어난 나는 몸이 좋지 않음을 느꼈다. 우리는 행진을 중단했다. 나는 말을 탈 수 없을 정도로 아팠으며 그날 중으로 병은 더욱 악화되었다......그래서 다음날 아침에 나는 몸을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두번째 날 아침에도 나는 여전히 너무 아파서 말을 탈 수가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호위를 맡은 캄파족들과 군인들의 책임을 덜어주기 위하여 움직여야만 한다고 생각하였다......국경을 넘을 때 극적인 사건은 없었다. 국경을 사이에 둔 양쪽 지역은 똑같이 황량한 무인지대였다. 나는 피곤하고 몽롱한 상태에서 표현할 수 없는 불행감으로 그 지역을 바라보았다. (167)
출처 : 박근형의 티베트 사천 자료실
글쓴이 : berdl28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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