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차 博物學⑴
이 원 홍 (사)한국차문화협회 이사장
중국차 이야기를 하는
이유
차(茶)는 공자나 노자 같은 위대하고 어려운 것이 아니다. 수천년 수백년 전의 그림 속에 있는 환상 같은 정경도
아니다. 나는 차를 생활 속에서 현실적으로 이해하여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공자처럼 어렵게 생각하면 대하기가 까다로워지고 노자처럼 오묘하게
생각하면 죽은 사람 제사지내는 꼴이 되지 않을까 걱정한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 버릴 수 없는 생명의 기호품이 차(茶)이기 때문에 그 맛을 더욱 소중하게
가꾸어 보려고 애쓰는 것이 차(茶)에 대한 열정이요, 탐구욕의 근본이다. 까다로운 조건을 붙여 생활과의 거리를 멀리하는 것을 차(茶)에 대한
열정이나 탐구욕으로 장려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생각한다.
내가 중국을 다녀온 것은 20회에 가깝다. 중국을 다녀오신 분들이 송(宋)나라, 당(唐)나라,
명(明)나라, 심지어 신농시대(神農時代) 차 이야기로 일관하는 것을 보면 때로는 마음이 답답해진다. 차(茶)의 역사에 관심을 갖지 말자는 뜻이
아니다. 중국차(中國茶)의 근원을 탐구하지 말자는 것도 아니다. 옛것에 너무 매달려 그것만이 절대적인 것처럼 만들지 말자는 노파심에서 하는
말이다.
중국 사람들은 차(茶)에 익숙하다. 우리보다 훨씬 익숙하다. 비행기나 기차 안에서 차(茶)를 들고 다니고, 길거리나 관광지를 다니면서도 꼭 차병(茶甁)을 차고 다니는 것을 보면 정말 기특하다. 그 분들 가운데 육우(陸羽)를 알고, 『다경(茶經)』을 아는 이가 얼마나 되겠는가? 육우를 몰라도 차(茶)맛을 아는 것처럼 차(茶)는 중국 사람들의 생활 속에서 자라나고 전승되고 있다는 사실을 중국을 다녀보면 저절로 알게 된다. 그래서 오늘부터 몇 번에 걸쳐 내가 직접 보고 체험한 지금의 중국차 이야기를 간략하게 정리해 ‘중국차 잡학’으로 묶어 볼까 한다.
어디서나 통하는 말,
차관(茶館)
우리나라의 다방처럼 중국에도 도처에 다방이 있다. 명승고적에는 필수적이다. 모양은 달랐지만 옛날에도
있었다. 사람들이 드나들며 돈을 주고 차(茶)를 사서 마시는 곳을 중국말로는 ‘차관(茶館, 차구안)’이라고 한다. 물론 한가지 이름으로 통일된
것은 아니다. 2층으로 된 다방을 ‘차루(茶樓, 차로우)’라고 한다. 그리고 ‘명방(茗坊, 밍팡)’이니 ‘차방(茶坊, 차팡)’이니 ‘차사(茶肆,
차시)’니, ‘차원(茶園, 차유안)’이니 ‘차청(茶廳, 차팅)’이라고도 한다. 시대에 따라 달라지기도 했지만 ‘차관’이라 하면 어디서나 통하는
말이다. 차관이란 이름을 몰라도 ‘차(茶)’자를 크게 쓴 깃발을 내걸고 있어 여행자들이 찾아가기에는 퍽 편리하게 되어 있다.
언젠가 일본의 위성방송에서 ‘차관’이란 연극공연을 녹화방송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중국의 유명한 작가 라오셔(老舍)의 명작 희곡을 연극으로 공연한 것이다. 여기서 본론을 벗어나 좀 지정거리는 것을 양해해 주시기 바란다. 노사의 이야기를 한마디 하고 넘어가야 하겠기 때문이다.
노사는 지금 살아 있으면 100세를 몇 달 넘을 정도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모택동(毛澤東)의 문화대혁명이 일어난 1966년 홍위병(紅衛兵)에게 체포되어 수 없이 가혹한 린치를 당한 그 다음날 사망했다. 사인(死因)에 대해 자살이라고 단정하는 쪽이 있지만 홍위병에게 체포된 사람이, 그것도 사람 취급조차 받지 못한 가혹행위에 시달리던 사람이 자살할 수 있는 자유가 있었다고 보는 것이 앞뒤가 맞지 않는다. 설사 자살이라고 치더라도 견디기 어려운 정신적 육체적 고통이 그로 하여금 죽음을 택하지 않으면 안되게 만들었을 것이니 결과적으로 타살이나 다름이 없을 것이다.
그의 나이 67세였지만 작가로서는 청춘기였다. 사후 12년만인 1978년 그의 명예가 회복된 이후
『정홍기하(正紅旗下)』 『고서예인(鼓書藝人)』 등 미발표 유작이 출판된 것을 보면 훌륭한 작품을 많이 잃어버린 것 같아 안타까워진다. 유머와
인정미 넘치는 그의 작품이 더욱 원숙해졌을 터인데, 홍위병의 만행에 인간으로서의 분노를 금할 수 없다.
노사는 1899년에 북경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서경춘(舒慶春, 슈친춘)이다. 청조(淸朝)의 실세인 만주족(滿洲族)이었지만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나 가난하게 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북경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으나 그 무렵의 중국은 의화단(義和團) 사건의 후유증으로 사회붕괴 과정이 진행되고 있는 실정이었다. 청조의 구체제 대신 근대화의 새로운 사회가 태동하고 있었다. 우리의 3·1운동에 자극을 받은 5·4운동이 결정적인 기폭제가 되었다. 왕조의 억압과 제국주의의 침략에 눈을 뜬 중국 사람들이 신문화를 수용하면서 새 중국의 정신적인 지주로 등장했다. 노사도 그중의 한 사람이었다. 유달리 문학에 관심이 많고 재능 또한 뛰어난 그는 주로 해학풍자문학(諧謔諷刺文學)에 정열을 쏟았다.
유럽 수학에서 돌아온 그는 일본의 중국 침략에 항전하는 ‘항전문예운동’에 열중했다. 그러다가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연구와 작품활동을 하다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직후에 귀국하여 인민예술가로 활동을 계속했다. 그무렵 발표한 그의 희곡 ‘차관(茶館)’은 서태후(西太后)의 변란으로 중단된 강유위(康有爲, 캉요우웨이)의 무술변법시대(戊戌變法時代)로부터 항일전쟁 승리까지 차관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사람들의 작태를 그린 유명한 해학풍자문학이다.
차관은 신문화의 바람이 휩쓸던 청나라 황혼기의 북경 명물이다. 해방 이후의 우리나라 다방을 상상하면
그대로다. 하루종일 다방을 사무실로 사용하는 사장족이 있는가 하면 위스키를 마시며 술집으로 삼거나 정보교환의 비밀장소로 사용하는 사람 등 손님의
종류도 가지각색이었던 한국의 풍물이었다.
중국의 차관도 마찬가지, 다른 것이 있었다면 음식을 팔고 강설(講說)을 공연하며, 사람을 모아 인력시장으로 활용한 것을 비롯하여 정치운동과 항일전쟁의 밀정(密偵) 거래소로 사용된 것이 특색이라 하겠다.
공산당도 없애지 못한
차관(茶館)
당시의 기록을 보면 차관의 종류는 크게 다섯 가지였다. 하나는 ‘대차관(大茶館)’이라는 차를 팔면서 가벼운
식사도 파는 요즘의 카페나 살롱 같은 곳이다. 그리고 둘째는 ‘차주관(茶酒館)’으로 차와 술을 함께 파는 곳이다. 그러나 술안주가 될 만한
음식을 팔지 않는다는 금기가 있었다. 손님들은 다른 곳에서 안주를 사가지고 와서 술을 마시도록 되어 있었다. 셋째는 ‘서차관(書茶館)’이란
것인데 ‘평서(評書, 핑수)’라는 민간 전래의 장편 이야기를 여러 가지 도구를 사용해 강설하는 것을 아침 저녁 하루에 두 번 정도 공연해 왔다.
넷째는 ‘야차관(野茶館)’으로 특히 여름철에 시원한 곳으로, 바람쐬러 나온 사람들에게 차를 파는 곳이다. 여름철에 계곡에 자리를 마련해 놓고
술과 식사를 파는 우리나라의 풍경을 연상하면 될 것 같다. 그리고 다섯째는 ‘청차관(淸茶館)’이다. 차만 파는 정통 찻집이지만 여기에도 손님들을
위한 서비스가 있었다. 장기와 바둑을 즐길 수 있도록 해 두었다는 것이다.
공산주의자는 이런 것을 반당적(反黨的)이거나 퇴폐적인 것으로 단정한다. 그들에게는 사상 교양과 당(黨)이 부과한 노르마를 달성하는 것 이외 인정되는 것이 없다. 감시자도 지도자도 없이 사람들이 운집해서 이야기를 서로 나누는 것은 당의 규율을 어기는 것이다. 그래서 모택동(毛澤東)은 중국을 공산화하자마자 먼저 이 서민들의 휴식처인 차관을 폐쇄해 버렸다.
그러나 민중의 생활 습성은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것이 아니다. 공산당의 폐쇄조치 이후에도 차관은 형태를 바꾸어 가면서 명맥을 이어갔다. 사람이란 고립해서 살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일이 있든 없든 서로 만나 이 이야기 저 이야기로 마음을 주고받는 것이 사람이다. 차관은 문을 닫았지만 구멍가게에서, 들판에서, 식당에서 차(茶)를 마시며 정담을 나누는 것을 막아내지는 못했다. 오히려 눈을 감아주는 것이 사태수습에 유효하겠다고 생각한 것인지 단속의 쇠사슬을 더 죄지는 않았다. 개성문화를 모조리 파괴한 문화대혁명기에도 작은 가게 규모에 불과하기는 했지만 ‘차포(茶, 차푸)’가 존재했던 것을 보면 그 뿌리를 공산주의도 어찌 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모택동이 폐쇄한 차관(茶館)을 등소평이 다시 연
이유
그래서 모택동이가 닫아버렸던 차관의 문을 등소평(鄧小平)이 다시 열어주었다. 개혁개방정책의 일환으로 차관영업을
허가해준 것이다. 민중이 아쉬워하는 것에 눈을 돌리게 된 셈이다. 그것이 이루어진 것이 70년대 후반에 들어서였다. 개혁개방은 제도의 변혁이
전제지만 우선 사람들의 마음의 문을 열어 새로운 중국 건설에 집중시키는 것을 택한 것이다. 그래서 중국 역사는 개혁개방을 ‘등소평이론’으로
명명, 문화대혁명에서 오류를 범한 모택동의 실책을 비판하고 있다.
지금은 북경뿐 아니라 중국 어느 곳을 가도 차관을 찾아 들어갈 수 있다. 나는 중국 4대 명산의
하나인 사천성(四川省)의 아미산(峨眉山)에 올라갔을 때도 그곳 산허리에 넓은 자리를 차지한 차관을 찾았다. 산동성(山東省)의 태산(泰山)과
안휘성(安徽省)의 황산(黃山)에서도 차관을 들렀다. 도시의 대로변뿐 아니라 명승고적에는 반드시 차관이 있다. 제갈공명(諸葛孔明)을 모신
성도(成都)의 무후사(武候祠)에는 요긴한 장소를 차지하고 관광객들의 휴식처를 겸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차(茶)는 그 자체가 문화이지만 차(茶)에는 수다한 인접문화(隣接文化)가 따른다. 찻잔을 만드는 도자기문화, 다정(茶亭)을 짓는 건축문화, 차(茶)를 생산하는 산업문화, 차(茶)를 사고 파는 상업문화, 다도(茶道)를 가르치는 차의 정신문화 등등 헤아릴 수 없는 문화가 차에서 발생했다. 오늘 설명한 차관도 하나의 문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