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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고려도경에. 고령세공백사기. 용재총화에. 황장산요지자료.화로제조법(陶)

chomice 2008. 1. 3. 11:22
1)-------------------
송 서긍의 선화봉사고려도경에서.
권제32 기명器皿3 다조茶俎,
토산 차맛이 쓰고 껄꺼러워 입에 넣지 못하고 오직 중국의 납다와 용봉사단을 귀히 여기니 선사하고 부터 외에도 상인들도 통해 파는 까닭에 근래 자못 차 마시길 즐겨하여 더욱 다구를 갖추어 금화오잔金花烏棧 비색소구翡色小區+瓦 은로銀爐 탕정湯鼎 모두가 중국제도를 본받은 것이다 무릇 연회하면 뜰 가운데서 삶아(*이때는 오늘처럼 뜨거운 물에 차를 넣는 게 아니고 차를 물에 넣고 막 끓기 까지 삶아 내는 탕의 식이었다) 은으로 된 연꽃으로 덮고 천천히 걸어 나오는데 자리를 돕는자의 말을 기다려 차가 두루 가고야 마실수 있어 식은 차를 마시지 않은 적이 없었다 관사안에 붉은 도마에 다구를 그 가운데 베풀어 늘어놓고 홍사건으로 덮어 하루에 세번 차를 제공하는데 탕으로 잇는다 고려인이 탕을 일러 약이라는데 매번 사신이 다 마시면 반드시 기뻐하고 혹 다 마시지 못하면 자신을 만만히 여기는 것으로 하여 반드시 앙앙히 가는 고로 항상 힘써 억지로 마신다.
와준瓦尊.
나라에 찹쌀이 없고 멥쌀로 누룩과 합해 술을 이루는데 색이 짙고 맛이 강해 쉬이 취하고 빨리 깬다 왕이 마시는 것을 양온이라 하는데 좌고左庫의 청법주도 두가지 품등이 있어 와준에 담아 누런깁으로 봉한다 대저 고려인이 술을 좋아하는데 좋은술 얻기가 어려워 민가에서 마시는 것은 맛이 얕고 색이 걸어 마시고 스스로 즐겨 모두 좋게여긴다.
등준藤尊.
등준은 곧 산도山島와 주 군에 보내는 것이다 속은 역시 와준이고 밖은 등으로 얽어 배속에서 서로 흔들거려 부딪쳐도 손치 않는다 위에 봉함이 있어 각기 주 군의 인문印文으로 적혔다.
도준陶尊.
도기의 색이 푸른 것을 고려인은 비색翡色이라 한다(*박물지에는 붉은 깃이 있는 물총새의 수컷을 비라하고 이게 없는 암컷을 취라한다는데 우리나라에서 본 비취새는 좀 푸른듯하여 시중의 비취옥과 색감이 꼭 같지는 않은 같다 다만 중국에서 秘色이라 하는 것을 당시 고려인 들이 어떻게 인식한 것인가 단서가 될수있다) 근년이래 제작이 공교해 색택이 더욱 아름답다 주준의 모양이 외 같은게 연꽃과 오리가 앉은 꼴을 하였고 또 능히 완 접시 배杯 구區+瓦 화병 탕잔湯盞을 만드니 모두 정요기의 제도를 모방한 까닭으로 생략하고 그리지 않으며 주준이 다른 그릇과 특별히 달라 나타낸다(*원래는 그림이 있는 도경 이었으나 현행본은 그림이 전하지 않음).
도로陶爐.
사자가 향을 내는것(*산猊出香)도 비색이다 위에 쭈그린 짐승을 했고 아래로 우러런 연꽃을 으로하여 받들었는데 여러 기물에 오직 이 물건이 가장 정교하고 다시 없으며 그나머지는 월주요의 옛 비색秘色이나 여주에 새로 차린 가마의 그릇과 대개 유사하다.
......
수옹水瓮.
물독은 도기다 넓은 배에 좁은 목 그 입은 좀 퍼지고 높이 육척에 넓이 사척오촌 들이기 삼석두되 관사 안에는 구리독을 쓰는데 오직 산도와 바닷길에 배로 물을 실어 서로 보낼때 쓴다.
.......
고려는 공예기술이 지극히 공교하다 그 절예물은 모두 공가에 돌아가니 복두소나 장작감이 곧 그 소所다 늘 흰 모시두루막에 검은비단두건을 쓰고 오직 역을 맡고 일을 쫓을 때면 관에서 자주 두루막을준다 또한 듣기를 거란의 항복한 포로 수만인이 그 공예기능자(열에 하나그 정예한자를 취한다)를 왕부에 머무르게해서 해마다 그릇과 복장이 더욱 공교해져 뜨고 거짓됨이 자못 많아 전날의 순질로 돌이킬수없다.

2)------------------
점필재집 이준록 하에서.
고령현에서 해마다 백사기를 바치는데 공인이 일삼음이 거칠어(*로망鹵莽) 그릇이 흔히 조악 이지러져(*고유) 관리가 힐책을 받았다 선공께서 이르자 공인을 불러 말하시길 옛날 순은 하빈에서 그릇을 굽고 호공은 그릇 쓰임을 이롭게해서 진나라에 봉해졌는데 이것이 어찌 하잖게 여길수 있으랴 너희들 할아비와 손자가 대대로 그 업을 지켜오면서 어찌 거칠기가 이 같은가 너희들 처자가 모두떡을 만들줄 알아 체질을 자주 거듭하면 쌀가루가 정결해지고 반죽을 충분히 오래면 맥리가 부드럽고 미끄러지니 그 일삼음이 이와 무었이 다르랴 하시고는 드디어 아홉번 체질하는 방법(九篩之法)을 가르쳐 정치하고 곱고 깨끗이 해 광주나 남원의 것보다 나은 위치가 되었다 이에 앞서 매번 진헌할 때마다 두읍의 공인이 상을 받고 현의 공인은 죄를 얻었는데 지금은 현의 공인이 상을 받고 두읍의 공인이 견책을 받음이 지금에 까지 힘 입는다.
*점필재 김종직 자신의 선고인 강호 김숙자에 대한 글인 점필재집 이준록 하편에서 고령백사기에 관한 대목을역한것임.
*좌전에 호공은 순의 자손 알보로서 주무왕이 진陳에 봉했다함.

3)--------------------
성현의 용재총화 권10 에서.
사람이 쓰는 것이 도요기가 가장 긴요한 것인데 지금 마포노량등의 곳에 모두 도요의 흙반죽으로 업을 삼고 있으나 이는 모두 와기인 항아리 독(*缸.瓮)종류로서 자기에이르러서는 모름지기 백토를 써서 정치精緻하게 번조한 뒤라야 쓰임에 맞다 바깥 지방의 각도(*外方各道)에 만드는 자가많이 있는데 오직 고령에서 굽는것이 가장 정품이나 광주의 더욱 정精함만은 같지않다 해마다 사옹원의 관리를 좌우변으로 나누어 각자 서리를 거느리고 가게 해서 봄에서 가을에 이르기까지 제작을 감독하며 어부에 수납하게 하는데 그 공로를 적고 등급을 매겨 우수한 자에게 물품을 내렸다 세종조에 어기는 백자를 사용(*원서나 영인본을 아직 보지 못했는데 원문은 사용이 아니라 전용專用인 것 같다) 했는데 세조조에 이르러 채색 자를 섞어 써 회회청回回靑을 중국에서 구해다 술병과 뢰무늬그릇 배盃 모난잔 등에 그려쓰니 중국과 다를게 없었다 그러나 회청은 드물고 귀해 중국에 구해도 많이 구할수 없었다 조정이 의논해 말하길 중국은 비록 궁촌에 초가점포에서도 모두 그린 그릇을 쓰니 어찌 모두 회청으로 그린 것이랴 마땅히 다른 물건으로서 그릴수 있는것이 있을것이다 중국에 방문하니 모두 말하길 이는 토청土靑이다하나 소위 토청이라 하는것도 구할수 없었다 이로 말미암아 우리나라는 그린 자기가 적다.
*성현은 고령이 가장 좋다 해놓고 마치 경기 광주는 외방外方이 아닌듯 새삼 광주가 더 좋다하니 이무렵 광주요는 이미 관요의식이 있었거나 김종직과 성현이 각자 자기가 본 쪽에서 유리하게 말한 탓도 있겠지만 김숙자가 기술 개발로 단연 일등품을 만든후 다른 곳에도 영향을 줘 성현이 기술할 무렵은 백중세를 넘어 서며 차츰 여건이 유리한 광주가 앞서며 분원화 되어 갔던 것으로 보인다.
*회회청: 서역에서 수입된 서아시아 아랍의 청료.
*토청: 명나라 때 부터 무명이 라는 흑갈색 광물을 태워 추출한 토산 청료.
*위의 구사지법九篩之法을 어떤 체의 목수로 보거나 그릇 종류에따른 아홉가지 목이 서로 다른 체로 볼수있고 또는 미세 입자를 얻기위해 도토를 아홉 단계로 쳐내려가는 수 라고 볼수있다 그러나 그렇다면 이때까지 우리나라 에선 자기 번조에 수비법이 없었거나 고령에선 질사토로 막굽거나 도토를 체로 쳐서 얻었냐는 문제가 생긴다 고대와기의 입자를 보더라도 대개 질흙은 수비율이 칠십%쯤 되므로 바구늬에 담아 사금일듯 물에 일어 낸것을 베로 쳐내는 한두번의 사징법篩澄法으로도 되겠고 고대 와기에 흔히 삼베자국이나 쌀체무늬 바구늬무늬(籃眼紋)를 볼수 있는데 이는 쓰고난 헌베를 박판에 감아 쓴것 이겠다 하지만 사토는 수비율이 이와 반대이므로 아홉단계로 체질해 내린 다는것은 너무나 비경제적이어 우리나라에서 수비법의 등장은 필연적이라 하겠다 보통 우리가 수비라 하지만 이는 흔히 단사와 같은 광물을 약재로 쓰기위해 물에 날려 고운 입자를 얻는 방법이고 이런 도징법淘澄法은 도세淘洗(특히 백자태토에 불필요한 요소를 씻어 낸다는 의미가 있음) 징니澄泥(주로 벌물을 맑혀 벼루굽는데 쓰는 수비의 일종) 사징등으로 불리는데 인근의 예천 두인리의 귀얄상사기 파편을보니 고대와기 처럼 미세한 모래입자가 섞여된 것이나 분명히 사토로된 견고한 것으로서 단지 수비를 거칠게 한것인지 모르겠고 세종실록지리지의 당시 상품자기소로 실린 전국 네곳중 두곳인 상주 어산리와 동기미외리의 상감자도 결코 이후 분명히 땅두멍을 파고 흙물을 일으켜 따로 가라앉혀 수비법으로 얻어 만든 근처에 조선 지방 백자보다 태질이 더 곱다 할수 없었다 다만 어산리는 마늘쪽 모양의 지정이 도토를 도징淘澄하고난 가소성 없는 일정한 입자 크기의 모래 찌기를 질물에 묻혀 점착해 만든 것으로 지정을 뗀 부분에 찌끼가 묻는데 비해 보은 사기막의 상감자 요지와 세지에 중품으로 등재된 괴산 사기막의 상감자 요지의 것이 그대로 도징된 자토를 써서 지정의 분리 부분의 그릇의 유층이나 태체까지 같이 좀 떨어져 나간것이 많은 듯했다 식견의 넓지 못함과 과학적조사의 결여로 단정 할수없고 문제만 내게 되었는데 물론 전기 고려자기의 도징법이 조선후기 수비법과 같다는 보장은 없겠고 사징과 수비의 절충식인지도 모르지만 아마 구사지법은 특히 미세하게 걸러야하는 유약을 거르는 아홉단계의 체질법을 말하는 것 같다.

3)---------------
황장산도요지에 대한 조선시대자료.
숙종40년(1713) 8월 6일 비변사 등록에,
사옹원 관원이 도제조의 뜻으로 여쭈어 아뢰기를, 본원의 시장柴場이 어용자기 번조에 수요되는데 관계한즉 일의 자체가 무겁고도 긴요한데 광주 무갑산이 수어청으로 이속되어 그 대신으로 시장처로 적합할 곳을 바꿔 정한 일이 일찌기 이미 아래에 명했사온대 그후 몇읍의 비고 노는 곳을 계장에 넣어 절수折受 받은 곳이 번번히 모두 환파 된 후 아직 거행하지 못했습니다 작년 가을 예천 민인들이 올린 계장의 글로 인해 본관本官에 조사 물은 결과 즉 이곳과 황장산은 서로 무관하다하고 또 지부地部의 양안量案에도 실리지 않았기에 민원을 쫓아 계장에 넣어 절수받아 차인差人을 따라보내 화전을 더했은즉 이미 수세량을 계산해 놓았으니 주인이 없으면 올 가을을 기다려 세를 거둘 뜻으로 계장에 넣어 윤허를 입음이 본도本道의 본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 비변사의 다시 어사서계를 상주한 것을 보니 예천땅의 사옹원이 절수 받은 것은 다른 것 과는 다르므로 감히 가볍게 의논해 혁파 할수없다 하고 무갑산은 원래 주원廚院의 절수처로서 본원이 절수받은 예천지는 호조에 속하고 무갑산은 본원에 환속하게 하는 일은 윤허를 입었습니다 대저 본원이 절수받은 예천땅은 멀리 황장산 오륙십리의 밖에 있어 처음부터 서로 무관한데 본관에서는 황장산 근처임을 의탁해 누백의 결전을 공공연히 숨겨 빠뜨리고 사적용도로 했습니다(*황장산은 금양지禁養地가 되니 이땅은 수세지에서 제외 되는 것을 말하는 것 같다) 그래서 본원은 일에 대한 정상을 념지하고 무갑산의 대신으로 받기를 청해 번조비용을 보충하는 것이 사리에 해로울게 없고 둔민등도 또한 본관의 징세가 편중하여 감당을 지탱키 어려워 본원은 민정을 곡진히 헤아려 편의에 따라 수세해서 모두 편리하고 좋을 뿐만아니라 진상자기 번조물을 하는외에 간단하여 무갑산의 대신으로 청해 받았습니다 무갑산은 일찌기 전의 자라 기른 나무가 이미 수어청의 땔감과 숯구이용으로 탁탁히 민둥산이 되어 무용의 땅이 되었는데 삼십년후 본원에 환속하는 것이 번역燔役의 낭패일 뿐만 아니라 그 사안에 있어 실로 미안 하게되어 또 예천의 빠진 전결이 호조에 귀속되면 불과 예대로의 세금을 거둬들일 뿐이고 본원이 필요한 것이 이미 어용도구에 관계되어 일의 경중이 현격히 다를 뿐만 아니라 지금 번조소의 기른 수목이 이미 모두 민둥해 마땅히 구울 나무를 들이고 지탱비용을 요리해야 되며 허다 물력을 갑자기 잡아 일해 낼수 없으니 변통의 길이 없을수 없습니다 청한 시장은 이미 환파 하는데 속했으니 사세가 또한 심히 우려 됩니다 무갑산을 호조에 이속시키고 예천의 절수받은 곳은 먼저의 계장에 내린데 의해 그대로 본원에 속하게해서 막중한 번역의 땅을 지탱해 돕게 함이 어떠합니까?
전하여 말하길 다시 묘당에 명해 품처 하겠다.

*가만보면 원래 분원이 광주 무갑산을 시장柴場으로 받아 십년에 한번 꼴로 땔감을 따라 가마터를 옮기며 나무가 자라는데 따라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게 되어 있는데 한번 깎은 곳은 화전이 생겨 나무가 다시 자라기 어렵고 중년에 수어청이 이를 맡아 민둥산을 만들고 대신해 받은 일곱개 면의 시장은 땔감도 마땅잖은데다 지역양반의 묘도 있고해서 민원이 야기돼 번번히 혁파되자 예천민인을 사주해 황장산 금양지를 사옹원이 맡도록 청원케하고 민원을 따라 절수받아 이미 번군을 보내 일을 개시했는데 다시 혁파의 말이 있자 그대로 해줄 것을 청원한 내용이다 예천 민인은 황장산이 개간되고 양안에 빠진 전결이 근거에 따라 좋도록 사옹원으로 납세되고 벌목따위의 고용으로 때울수 있으니 노는 땅을 살리는 셈이다 원래 문경은 조선초의 어느 지리지에도 도요소가 기재 되지않고 황장산이 있는 지금 문경시 동로면 일대는 예천땅 이었는데 세지에는 예천 용문면 금당실에 도기소가 하나 등재되어 있을 뿐이지만 용문사와 용문저수지로 가는 갈림길옆의 산윗기슭 내지리에 상감자요지가 있다고 보고 되었고 갈림길에서 바로 문경시 동로면 인곡리쪽으로 일키로쯤의 길가 좀들어간 밭에 귀얄분청자요지가 있다 여기서 이삼키로 쯤의 인곡리와 문경시 산북면의 종곡리 사이에 사기막주위의 소야리 등에 요지가 있는데 인곡리 일대에서 상감이나 분장자요지는 아직 확인치 못했다 개인 차편을 이용하지 못했고 교통도 불편해 내지리와 두인리 외에 사부동에 백자요지도 있다는데 몇번 지나가며 겨우 어렵게 두인리 요지만 확인했다 그외 좀 다른 곳으로 가은읍의 원북리 봉암사 길에 분청자 요지가 있다한다 중국 천목사 경내 천목요가 있은 것처럼 옜날에는 깊은 산중이라도 길목이 되는 곳에 절이있고 기와같은 절의 수요와 절에 왕래 하는 걸음에 맞춰 절곁에 요지가 흔히 있었다 언제부터 황장산으로 금양지가 되었는지 몰라도 이때까지 이산에서는 그릇굽기가 금지되었을 것이니 황장산일대에서 보다 이른시기의 요지가 발견되지 않는 것도 이의 증명을 돕는다 그릇의 풍모도 용문면 내지 두인요지의 것과는 물론 종곡리 사기막요지등 과는 몹시 달라 이전의 것이 경북북부 자체 지역안의 수요에 따라 만들어진 것으로 볼때 황장일대 요지는 공식적으로는 아직 나타나지 않지만 분원의 외번소가 되어 주로 땔감을 따라 남한강을 타고 서울쪽으로 갖다 팔았을 것으로 보이는데 사기항아리 입넓은 기름병 두껍고 견고한 사발양식 등은 단지 조선후기로 오면서 세월에 따라 그렇게 변한 것 만은 아닌 것 같으며 이는 바로 해방이후까지 남아 있던 문경도자와 직접 연결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인근요장.
특히 공업은 나날이 발전하여도 역시 옛사람들이 그나름의 주어진 여건 안에 맑고 깊은 감성으로 느껴 추구해 온것은 확실히 공업만으로 쉽게 따를수 없는 바있다 내가 지나다 보아온 도요장으로 영 호(호서)간에 걸친 황장산(다북솔이 자라 청장목이 되고 더 늙으면 속심이 누런 黃腸木이 됨)의 양편 문경의 관음리 도요지구와 단양의 방곡리 도요지구가 있다 모두 조선후기 이산 일대에서 숯구이와 특히 자체의 도토와 땔감으로 사기를 성업한 곳으로 이산일대 조선후기 가마터가 수십군데가 넘는걸로 알고 있으며 다만 여기서 조선전기 이전의 가마터는 알지못한다 방곡도예촌은 단양팔경의 사인암에서 4키로쯤 상류일까 계속 경관을 따라 여기서 황장산 약수터를 지나며 차로 오분쯤 벌재를 넘어 동로면사무소가있는 부락에 들어 오른쪽 길로 쭉 문경읍 가는 길로가서 고개를 넘어서부터 길가에 또는 좀 들어간 산재된 요장을 하나씩 찾을수 있을 것이다 관음리는 흙망뎅이를 빚어 쌓아 만든 망뎅이 가마란 옛가마가 하나 남아 있다한다 그리고 문경읍을 지나 새재 관문앞 길가에 또 몇 요장이 있다 그런데 관광사업과 맞추어 또는 단지 공산물이 아닌 예술품 전통미를 추구하기위해 전통가마를 운영한다해도 옛식으로 사토를 수비하여 태토를 구한다는 것은 정제된 흙을 바로 사 쓰는 것보다 여간 불편 불확실하며 고비용인 모양으로 이천에서 사들이는 걸로 아는데 자체 사토는 어느 집이 그렇게 만드는 가를 아직 모르고 또한 유약도 대개 돌공장에서 분쇄한 규석 장석 백운석등의 가루를 인스턴트로 조합하고 순수 초목재는 그냥 체질해서 유로 쓰면 단지 그릇의 유층이 고루 씌워 지지않고 군데군데 뭉치며 흘러내리기도하는데 이 흘러내리다가 맺힌 자국을 눈물자국 같다해서 누흔이라하며 시중의 무슨 나무재유 그릇 이란데서 쉽게 볼수있을것이며 유를 덤벙식으로 적신그릇에 잘나타난다 자체유로 이런 예외가 있고 심지어 무슨유 무슨유 해서 말통에 얼마
씩 사 쓰는데(만오천원쯤으로알고있음) 당연히 가격도 개인적으로 만드는 것보다 싸고 편리하게 되어 있으며 구워내면 훨씬 빛나게 전문적으로 조합해 파는걸로 알고있다 다만 시중의 별 때깔없는 그릇 들은 조합해 유를 만들어 낸 것으로 보면 된다 이게 꼭 나쁘다는 것은 아니지만 비록 그 전통가마라해도 그 속속들이가 이런것도 있음을 말함이 문외한의 체험에 도움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상주 이안면 흑암리에 옹기요장이 두군데있다 모두 공산품으로 주력 생산하고 있을뿐이지만 큰독은 개량옹기가마에 굽고있다 이곳의 날그릇에 자신이 유토를 배합 가져가 유약을 만들어 염가에 시험할수 있을것이다 공인이 아니라도 설명을 익히듣고 작업의 대강을 익힐수있겠지만 옹기는 보기보다 난점이 있습다 소성화도가 자기보다낮아 흔히 광명단 이라부르는 납화합물을 쓰지않고 보광을 내기란 여간어려운게 아니다 자기보다 비할바 없이 높은 소모성의 흙값과 연료비에따른 시장 경쟁력을 감안해서 그리 쉽게 소성온도가 높은흙을 택하거나 연료비를 올릴수있는게 아니다 또 높인다면 그건 산화자기지 옹기가 아니라고 할수있다 그리고 연료비만 좀 올릴 의도가 있어도 만약 옹기토에 너무온도를 올리면 이른바 유하여 찌그러진다는 것이 될것이다 만약 일단 외관에 성공했다더라도 약간의 주의가 필요하다 이런 그릇들은 단지 전시 감상품이 아니며 몇해 안가서 흔히 옛 흑자처럼 유층이 벗겨 지거나 장맛이 있고 없고는 나중 문제치고 옻그릇 처럼 검게해서 겉만 훌렁 녹여 번질난 것에 장을 가득담아 옥상 베란다 같은데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한여름 뙤약볕을 쬐면 퍽 터져 장이 쏟아내릴 수 있다 바로 반응이 오지 않을까 사기를 체험했다해도 옹기에 부딪힌다면 체험의 대강은 물론이고 도요상식의 깊이를 말할것은 없겠다.

6)-------------
화로 제조법  
유중림의 증보산림경제 권16 잡방에서,
화로를 만듬에는 마땅히 기와굽는 흙을 쓴다 없을 것 같으면 진황토를 수비해서 모래와 돌을 제거해서 쬐어 말리고 따로 휴지를 물에 적셔 고루어 극히 가늘게 해서 황토속에 많이 넣고 물로 고루어 질을 만들어 찧기를 천번해 넓은 판대기의 난간위에 두고 펴는데 두껍고 얇기는 뜻에 따르고 반쯤 마르도록 쬐어 말려 칼로 잘라 끊은 질로 화로형을 만든다 혹 모나게하고 혹 둥글고 혹 사방모퉁이 혹 여덟모로 역시 뜻에 따라 하는데 따로 다듬이 질한 흙을 쓰서 물로 다시 질을 만드니 이 질이 곧 모퉁이를 붙이는 교착제다 모를 합치고는 가는 새끼로 온 면을 얽어 놓아 평정하도록 하고 조금이라도 비틀려 기울지 않도록 해서 쬐어 다 마르도록한다 따로 대나무 못이나 가로못으로 모퉁이 서너곳을 합하고 화로의 입 테두리 역시 다듬이 질한 흙을 잘라 긴가닥을 만들어 밖에 붙인다 화로가 이루어 이미 말라 가면 얽은 새끼는 날카로운 칼로 끊어내고 사면 불평한 곳은 고기 아교를 쓰서 백지를 화로의 전신에 붙이고 또 고기아교를 삼채송연에 고루어 보탠다 무릇 화로는 깊어야지 밤새도록 불을 지니며 넓어야 도토리와 밤을 뭉게 익힐 수 있다 자주 상치를 황토에 넣고 찧어 질을 만들어 화로를 만드는데 구워내면 구리같다.

*眞黃土란 토갈색 일반 노천흙이나 더러 좀 붉은 흙 까지도 관습적으로 황토라 부르곤 하므로 여기서 특히 누런흙을 가리켜 말한듯 한데 보통 언덕의 절개지 같은 곳을 보면 표층의 흙은 비바람에 풍화 철분이 산화돼 붉은빛이 많고 깊이 내려갈수록 색이 빠져 누런 흙이되며 더내려 갈수록 옅어져 흰흙이 나오고 바로 암반이 나온다 여기서 중간의 누런흙이 표준적인 옹기흙으로 한다면 바로 위층은 이보다 내화도가 약한 기와흙이 되고 옹기흙 밑은 자기흙의 순서가 되겠는데 기와흙을 보다 내화도가 낮은 흙을 써온 이유는 단지 실외 건축재료로 그렇게 필요 이상 숙성도가 높고 채취에 더 까다로운 흙을 쓸 필요가 없으려니와 생흙을 쓸때 표층에 가까운 흙 일수록 이기기도 좋아 기와 만드는 것을 사발 반죽하듯 품을 들일 것은 없는 것이지만 뭤보다 중요한 것은 검정기와를 만들때 단지 환원염의 색을 이루는게 아니고 매연의 검댕이를 입히는데 옹기흙 이상의 그릇은 숙성화도가 높아 매연이 타버리고 잘 들이지 않는 까닭에 고대의 재그릇은 기와처럼 검지않고 흔히 재빛일 뿐인 이유가 여기있다 우리나라의 고대의 기와일수록 환원염에 의도해 만들기보다 매연에 치중해 검게한 공법으로서 미처 매연이 잘 입히지 않은 것은 산화염에 가까운 붉은빛의 기와편을 흔히 볼수있다 조선후기로 오면서 기와중에 비교적 내화도가 더 높은 흙을 쓰면서 매연보다 철저히 환원해서 흑청빛을 잘낸게 더러 보이니 이는 분명 천공개물에서 말하는 익은 가마위에 물을 부어 침투된 증기로 산소를 뽑는 철저한 환원의 전유법轉釉法이 응용되지 않았으면 이루지 못할것 같은 것이다 이처럼 철저하지는 않지만 고대의 재그릇 에는 충분히 환원을 잘 이루어 푸른빛이 비치는 회청색의 재그릇도 많은걸봐서 고대로 갈수록 기와제조에 있어서 까지는 매연의 검정기와를 의도할뿐 굳이 일반용기 처럼 그다지 환원을 의도하지 않았던 것 같다 휴지 입자를 섞어 화로를 만든다는 것은 나중에 태워 만들어 냈을때 기공성이 많게 해서 열이 잘 통하게 하려는 것일수 있고 반죽에 가소성을 높이고 구울때 변형이나 터짐을 줄이려는 것일 수 있겠는데 미상이다 상치의 또는 쓴냉이의 흰즙이 어떤 작용을 과연 하는지도 미상이나 이는 우리 화로제조에 오랜 전통적 경험지식의 산물일 것으로 단지 관념적 처방으로 단정할수 없으니 한번 실험적 보고와 응용을 권유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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