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장 - 평화의 씨앗
인간은 자신의 창의성을 발휘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리고 창의성을 발휘하려면 자유가 필수불가결하다. 나는 망명지에서 자유롭다. 31년이 넘는 망명생활을 하면서 자유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민족이 우리 조국에서 똑같이 자유롭지 않고서는 내가 티벳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별로 잘하는 일이 아니다. (281)
후에 내가 만난 사람들은 중국을 방문하기 이전에는 대체로 중국을 지지하는 사람들이었지만 티벳을 여행한 후에는 견해를 바꾸지 않을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들이 정치적인 문제에는 별 관심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자신들의 입장을 바꾸어야겠다고 말했다. 어떤 노르웨이 사람이 특별히 기억에 남는다. 그는 중국이 티벳 종교를 파괴한 것에 관하여 대단히 놀랍다고 말했다. 그는 두 번째로 라사에 다녀온 지금에서야 실제로 무엇이 어떻게 되어가는지를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나의 동포들을 위하여 할일이 없느냐고 내게 물었었다. 나는 이런 질문을 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대답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은 그가 본 것을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에게 사실 그대로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가르쳐주었다. 그런 방법으로 이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티벳이 겪고 있는 곤경을 점차 이해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284)
롭상 삼텐(달라이 라마의 형)이 죽은 것이다. 그는 겨우 쉰네 살이었다. 나는 무척 상심했으나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제1차 진상조사단의 일원으로 활동했던 것이 그에게 깊은 심리적 영향을 끼쳤던 것 같다. 그는 눈앞에 분명히 드러나는 티벳인들의 고통과 불행에 무관심한 중국인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전에는 언제나 농담도 잘하고 명랑한 편이었으나(그는 고도로 세련된 그리고 대단히 통속적이기도 한 유머감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 진상조사단의 일원으로 티벳에 다녀온 뒤로는 우울한 표정으로 지내는 때가 많아졌다. 그래서 좀 지나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말하자면 울화병으로 죽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286)
롭상 삼텐 형을 회상해 보면 그의 인간성에 항시 감동받게 된다. 그는 나에게 다른 티벳인들과 마찬가지로 언제나 존경심을 보여주었고, 나를 동생으로 대하지는 않았다. 예를 들어서 내가 집에 가거나 또는 다른 곳을 여행하기 위해서 집을 떠날 때면 그는 변함없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문에 도열해서 인사를 했으며 나의 안전을 기원해 주었다. 그는 또 대단히 동정심이 많은 사람이기도 했다. 한번은 누군가 그에게 인도 동부 오릿사에 있는 나환자 수용소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나도 그렇지만 그는 깊이 감동되어서 타인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무슨 일을 할 것인가를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그에게 티벳 망명정부가 나환자 수용소를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물어보았을 때 그는 눈물을 흘리면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지 할 준비가 되어있다고 대답했다. (286)
티벳 국민들과 중국간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첫 번째 요건은 신뢰회복이다. 지난 3년 간 대학살이 자행되었다. (믿을 수 없게도 130만 명의 티벳인들이 굶주림과 사형, 고문과 자살로 인하여 목숨을 잃었고, 수만 명이 투옥되었다.) 중국 군대의 철수만이 화해를 향한 첫걸음이 될 것이다. (289)
제15장 - 보편책임과 선의
여기에서 잠시 나는 몇몇 외국인들에게 깊은 감사를 표하고 싶다. 그들은 전혀 그럴 의무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고통받는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 그와 같은 자발적인 인간애는 인류의 미래를 위한 유일한 희망이다. 그들 중 어떤 이들은 심한 부상을 입은 티벳인들을 돕기 위해서 계속해서 자신들의 목숨을 걸었다. 게다가 그들은 중국인들의 온갖 야만적인 행위들을 증언하고 사진도 찍었다. (295)
정오경에는 경찰이 조캉 사원을 덮쳐 적어도 12명의 승려들을 살해했다. 한 승려는 그들에 의해 몹시 구타당한 후에 두 눈이 뽑힌 채로 지붕 위에 내던져졌다. 티벳의 가장 거룩한 성지가 도살장이 된 것이었다......사건이 있은 후 한 달이 못 되어 라사를 갔다온 영국 정치가 애날스 경한테서 처음으로 자세한 소식을 들었다. 베이징 정부의 허가를 받은 대표단의 지도자였던 애날스 경의 방문 목적은 티벳의 인권 현황을 조사하는 것이었다. 대표단의 다른 일원과 마찬가지로 그는 광범위한 폭력이 티벳 인민들에게 행해지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충격을 받았다. 대표단들은 또한 소요로 인한 투옥자들에게 고문과 학대가 자행되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를 발견했다. 그들은 수많은 목격자들로부터 상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국제 인권감시위원회에 의해 출간된 그들의 보고서는 ‘신속하고 적극적인 대응책이 요구된다’고 밝히고 있다. (296~297)
1989년 1월 28일 판첸 라마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때마침, 아주 드문 일이었지만, 그는 티벳을 방문중이었다. 그는 당시 베이징에 살고 있었다. 그는 겨우 쉰세 살이었다. 당연히 나는 깊은 슬픔에 잠겼다. 나는 티벳이 진정한 자유의 투사 하나를 잃었다고 생각했다. 일부 티벳인들이 그를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보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실은 나도, 그가 아주 젊었던 1950년대 초에 그가 중국 편을 들어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용하려 한다는 의심을 품었었다. 그러나 나는 그의 애국심을 믿는다. 중국인들이 1978년 그를 석방한 이후로 줄곧 그를 꼭두각시처럼 이용해 왔지만, 그는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그들에게 반대했다. 신화사통신의 보도에 의하면 죽기 직전에 행한 한 연설에서 그는 티벳에서 중국 당국이 저지른 많은 실책들에 대해서 몹시 심한 비난을 가했다. 그는 마지막까지 용기있게 행동했던 것이다.
이틀 후에 그는 타쉴훈포 사원에 마지막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거기에서 그는 자신의 전임자들의 묘소를 참배한 직후 치명적인 심장마비를 일으켰다. 많은 사람들은 그가 자신의 사원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은 상징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진정한 정신적 지도자가 보일 수 이는 사려깊은 모습이었다.
나는 비록 그가 죽기 전에 만날 수는 없었지만 전화를 통해서 세 차례나 대화를 나누었다. 두 번은 그가 베이징의 자기 사무실에 있을 때였고(그는 인민대표로 임명되어 있었다), 한 번은 그가 해외에 있을 때였다. 당연한 일이지만 베이징에서 그의 통화는 도청되었다. 나는 이 사실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두 번째 통화가 있은 지 몇 주일 후, 아주 신중하게 편집된 우리들의 대화 내용이 중국의 언론을 통해 보도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오스트레일리아를 방문중에, 이미 약속된 시간에 감시원을 교묘히 따돌리고 독일(서독)에 있는 나와 통화를 할 수 있었다. 우리는 오래 얘기를 나눌 수는 없었지만, 그가 마음속으로는 아직도 자신의 종교와 민족과 조국에 충성을 다하고 있다는 확신을 갖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래서 그가 지나치게 많은 사업에 관심을 보인다는 좋지 않은 소식이 라사로부터 전해졌을 때에도 나는 별로 염려하지 않았다. 그가 결혼을 했다는 얘기도 들려왔다. (299~300)
다음날부터 경찰 수사를 시작했으며 무차별 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목격자들은 그들이 티벳인들의 집에 자동소총을 난사해 전가족을 몰살시키는 것을 보았다고 증언했다.
불행하게도 티벳인들은 경찰과 보안요원들을 공격함으로써 이에 맞섰다. 아주 적은 수이지만 어떤 경우에는 무고한 중국 시민들을 공격하기도 했다. 이것은 나를 아주 슬프게 했다. 어떠한 경우라도 티벳인들이 폭력에 의존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었다. 600만 우리 티벳인들에 비해서 10억이 넘는 인구를 가진 중국은 만약 그들이 원하기만 한다면 티벳인 전부를 지구상에서 완전히 없애버릴 수도 있는 일이었다. 누구든지 적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훨씬 건설적이다. 돌을 들어 분노의 대상을 향해 던지기보다는 그 분노를 잊는 법을 배우는 것이 훨씬 유익하다. 분노가 클 때일수록 더더욱 그렇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선행을 행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때는 바로 가장 커다란 역경에 처해 있을 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나는 그런 말들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비현실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것은 그들에게는 너무 지나친 요구이다. 내가 그런 끔찍한 고통 속에서 매일매일을 살아가고 있는 티벳인들에게 중국인들을 사랑할 수 있기를 기대하는 것은 잘못일지 모른다. 그러므로 나는 폭력을 용서할 수는 없지만 경우에 따라 불가피한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실제로 나는 우리 국민들의 용기를 진심으로 존경한다. 시위에 참가한 사람들 중 많은 수는 여자와 어린애들 그리고 노인들이었다. 수백 명의 남자들이 첫날 저녁에 체포되었다. 따라서 둘쨋날과 셋쨋날에 그렇게도 활발하게 자신들의 감정을 표출한 사람들은 대부분 그들의 가족들이었다. 그들 중 많은 수가 아마 이제는 죽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감옥에서 고문당하고 매맞으면서 고통스런 나날을 보내고 있다. (300~301)
(천안문 사태 당시) 정부 당국은 폭력을 씀으로써 중국 인민들 사이에 학생들에 대한 우호적인 감정을 북돋웠을 뿐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중국 공산주의의 수명을 2분의 1에서 3분의 1 가량 단축시킨 것이다. 그들은 또 자신들이 어떤 방식으로 움직이는지 전세계에 여실히 드러내었다. 중국의 인권탄압에대한 티벳인들의 호소를 비난하는 것은 이제 불가능하게 되었다. (302)
노벨 평화상이 내 개인에게는 큰 문제가 아니었지만 티벳 인민들에게는 큰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 왜냐하면 이 상의 진정한 수상자는 그들이었기 때문이다. 세계가 자비와 용서 그리고 사랑의 가치를 인정한다는 사실에 나는 만족했다. 많은 국가의 국민들이 자신들에게도 평화적인 변화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아가는 것이 기뻤다. 과거에는 비폭력적인 혁명은 관념적인 것으로 여겨졌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명백한 증거에 나는 안도감을 느꼈다.
마오 주석은 정치적인 힘은 총구에서 나온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는 부분적으로만 옳았다. 총구에서 나온 권력은 일시적일 뿐이다. 결국에는 진리와 정의, 자유와 민주를 향한 사람들의 열망이 승리한다. 정부가 무슨 일을 하든지 인간의 정신은 승리하고야 만다. (304)
그와 같은 박애정신의 실례들은 중국인들에 의한 우리 민족의 고난도 언젠가는 끝이 있으리라는 확신을 갖게 했다. 왜냐하면 수억의 중국인들 중에서 어느 한 순간에라도 잔학행위에 참여한 사람은 수천 명에 지나지 않는 반면, 수백만의 사람들은 선행을 베풀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306)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자신들이 경찰이 시위진압시 사용하는 전기봉으로 고문받았는가를 얘기했다. 한 젊은이는 그들이 전기봉을 자기 입 속에 집어넣어서 입 속이 다 부르텄다고 했으며, 한 비구니는 취조관들이 이 도구를 자신의 항문과 질 속에 집어넣어 고문했다고 말했다.
이러한 자료들을 열거해 중국인 전부를 매도하는 것은 유혹적이기는 하지만 옳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그러한 만행이 잊혀져서는 안 된다. 나는 비록 내 인생의 거의 대부분을 망명지에서 살아왔으며, 항상 중국인들의 문제에는 민감한 관심을 지녀왔지만(그 결과 나는 ‘중국 관측통’으로 제법 관록이 있다) 아직도 중국인들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307)
비록 공산주의가 ‘인민’에 봉사한다고 공언하지만 그 ‘인민’이라는 말은 모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견해와 의견을 같이하는 소수의 사람들만을 의미한다는 데 문제가 있는 것 같다. (309)
그들은 모든 사람과 모든 것을 의심하게 되고, 의심은 끔찍한 불행의 시발이 된다. 왜냐하면 의심은 기본적인 인간 본성에 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한 인간이 다른 한 사람을 믿고 싶어하는 욕망은 인간에게 가장 본질적인 부분이다. (309)
만약 내가 어떤 정치적인 신념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나는 아마 절반쯤 마르크스주의자일 것이다. 자본주의가 인간적인 모습으로 실현되기만 한다면 아무런 반대도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나의 종교적인 믿음은 나로 하여금 사회주의와 보편주의로 가게 만든다. 그것들은 불교의 원리들과 보다 잘 어울린다. 마르크스주의의 다른 매력은, 인간이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불교도들의 생각과 일치한다.
그러나 민주적인 체제하에서 자본주의적인 정책을 추구하는 국가들이 공산주의 이상을 추구하는 국가들보다 훨씬 자유롭다. 그래서 나는 궁극적으로 사회 전체에 봉사할 수 있는 인도적인 정부를 좋아한다. 어린이나 노인들, 그리고 장애자들까지도 사회의 생산적인 구성원이 될 수 있다.
절반은 마르크스주의자라고 말하면서도 정작 투표를 하게 된다면 나는 아마 환경보호론자들의 정당에 표를 던질 것이다. 최근 세계의 아주 긍정적인 발전 중 하나는 자연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의 증대이다. 자연은 성스럽고 신성한 무엇은 아니다. 우리들이 지구를 돌보는 것은 그저 우리의 가정을 돌보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들은 자연에서 왔으며 자연에 대적할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환경은 종교나 윤리, 도덕의 문제가 아니라고 내가 말하는 이유이다. 그러한 것들은 장식물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것들 없이도 생존할 수 있지만, 만약 계속 자연에 대해서 적대적이 된다면 생존조차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점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만약 우리가 자연의 균형을 파괴한다면 우리 인간은 고통받게 될 것이다. 나아가 현재의 우리는 미래의 세대들도 생각해야만 한다. 깨끗한 환경은 다른 어떤 것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이 향유해야 할 권리이다. 따라서 우리가 후손들에게 물려주는 세계가 우리가 그것을 물려받았을 때보다 더 건강하지 못하다 해도 최소한 그만큼은 건강하게 유지시켜야만 하는 것이 우리들의 책임이다. 이것은 그리 어려운 제안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 개인적으로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지만 우리 모두가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작은 일일지라도 우리는 개인적으로라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만 한다. 방을 나갈 때 불을 끄는 일은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일지는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가 그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인간은 어떤 의미에서 지구의 자식들이다. 이제까지는 우리들의 어머니가 자식들의 행동을 잘 참아왔지만 최근에 와서는 그녀의 인내가 한계에 도달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309~310)
한 승려로서 나의 관심은 전 인간 가족의 구성원들에게 걸쳐 있다. 다시 말해 모든 고통받는 중생들에 대한 나의 관심과 배려는 지대하다.
이러한 고통은 무지에 의한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행복과 내적인 평화와 만족감에서 오는 것이다. 이런 내적인 평화와 만족감은 타인에 대한 사랑과 자비를 기르고, 분노와 이기심 그리고 탐욕을 없앰으로써 함양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 말이 지나치리만치 소박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들에게, 지구의 어느 귀퉁이에서 왔건 근본적으로 우리는 모두 같은 인간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싶다. 우리는 모두 행복을 추구하며 고통을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공통적이고 기본적인 요구와 관심들을 가지고 있다. 나아가 우리 인간은 모두 자유를 원하며 우리들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권리를 원한다. 그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311)
우리는 우리들이 공유하고 있는 지구와 서로에 대한 선의와 깨달음에 기초한 보편적인 책임의식을 계발할 필요가 있다.
나는 내가 믿고 있는 불교가 사랑과 자비심을 길러주는 데 유익하다고 느껴왔지만 이러한 속성들은 종교를 믿건 믿지 않건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발전될 수 있는 것이라고 확신한다. 나는 또 모든 종교는 같은 목표를 추구한다고 믿는다. 선을 장려하고 모든 인간들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모든 종교의 목적이라고 믿는다. 비록 방법은 달라 보일지 모르지만 목적은 다 같다고 본다.
우리들의 삶에서 과학기술의 영향이 증대하는 것과 더불어 종교와 그 밖의 정신적인 영역들은 우리 자신들의 인간성을 상기시켜 주는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양자 사이에는 아무런 모순도 없다. 양자는 각각 서로에 대한 통찰을 우리에게 가져다준다. 과학과 붓다의 가르침은 둘 다 모든 것들의 근본적인 통일성을 말해주고 있다. (311)
우리도 더 평화롭고 더 인간적이며, 더 아름다운 세계를 건설하는 데 기여하고 싶다. 미래의 자유로운 티벳은 어려운 자를 돕고, 자연을 보호하며, 평화를 보존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사소한 것일지는 모르지만, 정신적인 것들과 실제적이고 실용적인 태도를 융합시키는 티벳인들의 능력이 특별한 기여를 할 수 있으리라고 나는 믿는다.
끝으로 나는 나에게 깊은 감명을 주는 짧은 기도문 한 구절을 여러분들과 함께 음미해 보고 싶다.
세상이 계속되는 한,
그리고 생명이 존재하는 한,
그때까지 나도 살아
이 세상의 온갖 고통을 물리치리. (312)
인간은 자신의 창의성을 발휘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리고 창의성을 발휘하려면 자유가 필수불가결하다. 나는 망명지에서 자유롭다. 31년이 넘는 망명생활을 하면서 자유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민족이 우리 조국에서 똑같이 자유롭지 않고서는 내가 티벳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별로 잘하는 일이 아니다. (281)
후에 내가 만난 사람들은 중국을 방문하기 이전에는 대체로 중국을 지지하는 사람들이었지만 티벳을 여행한 후에는 견해를 바꾸지 않을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들이 정치적인 문제에는 별 관심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자신들의 입장을 바꾸어야겠다고 말했다. 어떤 노르웨이 사람이 특별히 기억에 남는다. 그는 중국이 티벳 종교를 파괴한 것에 관하여 대단히 놀랍다고 말했다. 그는 두 번째로 라사에 다녀온 지금에서야 실제로 무엇이 어떻게 되어가는지를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나의 동포들을 위하여 할일이 없느냐고 내게 물었었다. 나는 이런 질문을 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대답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은 그가 본 것을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에게 사실 그대로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가르쳐주었다. 그런 방법으로 이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티벳이 겪고 있는 곤경을 점차 이해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284)
롭상 삼텐(달라이 라마의 형)이 죽은 것이다. 그는 겨우 쉰네 살이었다. 나는 무척 상심했으나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제1차 진상조사단의 일원으로 활동했던 것이 그에게 깊은 심리적 영향을 끼쳤던 것 같다. 그는 눈앞에 분명히 드러나는 티벳인들의 고통과 불행에 무관심한 중국인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전에는 언제나 농담도 잘하고 명랑한 편이었으나(그는 고도로 세련된 그리고 대단히 통속적이기도 한 유머감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 진상조사단의 일원으로 티벳에 다녀온 뒤로는 우울한 표정으로 지내는 때가 많아졌다. 그래서 좀 지나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말하자면 울화병으로 죽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286)
롭상 삼텐 형을 회상해 보면 그의 인간성에 항시 감동받게 된다. 그는 나에게 다른 티벳인들과 마찬가지로 언제나 존경심을 보여주었고, 나를 동생으로 대하지는 않았다. 예를 들어서 내가 집에 가거나 또는 다른 곳을 여행하기 위해서 집을 떠날 때면 그는 변함없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문에 도열해서 인사를 했으며 나의 안전을 기원해 주었다. 그는 또 대단히 동정심이 많은 사람이기도 했다. 한번은 누군가 그에게 인도 동부 오릿사에 있는 나환자 수용소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나도 그렇지만 그는 깊이 감동되어서 타인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무슨 일을 할 것인가를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그에게 티벳 망명정부가 나환자 수용소를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물어보았을 때 그는 눈물을 흘리면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지 할 준비가 되어있다고 대답했다. (286)
티벳 국민들과 중국간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첫 번째 요건은 신뢰회복이다. 지난 3년 간 대학살이 자행되었다. (믿을 수 없게도 130만 명의 티벳인들이 굶주림과 사형, 고문과 자살로 인하여 목숨을 잃었고, 수만 명이 투옥되었다.) 중국 군대의 철수만이 화해를 향한 첫걸음이 될 것이다. (289)
제15장 - 보편책임과 선의
여기에서 잠시 나는 몇몇 외국인들에게 깊은 감사를 표하고 싶다. 그들은 전혀 그럴 의무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고통받는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 그와 같은 자발적인 인간애는 인류의 미래를 위한 유일한 희망이다. 그들 중 어떤 이들은 심한 부상을 입은 티벳인들을 돕기 위해서 계속해서 자신들의 목숨을 걸었다. 게다가 그들은 중국인들의 온갖 야만적인 행위들을 증언하고 사진도 찍었다. (295)
정오경에는 경찰이 조캉 사원을 덮쳐 적어도 12명의 승려들을 살해했다. 한 승려는 그들에 의해 몹시 구타당한 후에 두 눈이 뽑힌 채로 지붕 위에 내던져졌다. 티벳의 가장 거룩한 성지가 도살장이 된 것이었다......사건이 있은 후 한 달이 못 되어 라사를 갔다온 영국 정치가 애날스 경한테서 처음으로 자세한 소식을 들었다. 베이징 정부의 허가를 받은 대표단의 지도자였던 애날스 경의 방문 목적은 티벳의 인권 현황을 조사하는 것이었다. 대표단의 다른 일원과 마찬가지로 그는 광범위한 폭력이 티벳 인민들에게 행해지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충격을 받았다. 대표단들은 또한 소요로 인한 투옥자들에게 고문과 학대가 자행되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를 발견했다. 그들은 수많은 목격자들로부터 상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국제 인권감시위원회에 의해 출간된 그들의 보고서는 ‘신속하고 적극적인 대응책이 요구된다’고 밝히고 있다. (296~297)
1989년 1월 28일 판첸 라마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때마침, 아주 드문 일이었지만, 그는 티벳을 방문중이었다. 그는 당시 베이징에 살고 있었다. 그는 겨우 쉰세 살이었다. 당연히 나는 깊은 슬픔에 잠겼다. 나는 티벳이 진정한 자유의 투사 하나를 잃었다고 생각했다. 일부 티벳인들이 그를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보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실은 나도, 그가 아주 젊었던 1950년대 초에 그가 중국 편을 들어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용하려 한다는 의심을 품었었다. 그러나 나는 그의 애국심을 믿는다. 중국인들이 1978년 그를 석방한 이후로 줄곧 그를 꼭두각시처럼 이용해 왔지만, 그는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그들에게 반대했다. 신화사통신의 보도에 의하면 죽기 직전에 행한 한 연설에서 그는 티벳에서 중국 당국이 저지른 많은 실책들에 대해서 몹시 심한 비난을 가했다. 그는 마지막까지 용기있게 행동했던 것이다.
이틀 후에 그는 타쉴훈포 사원에 마지막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거기에서 그는 자신의 전임자들의 묘소를 참배한 직후 치명적인 심장마비를 일으켰다. 많은 사람들은 그가 자신의 사원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은 상징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진정한 정신적 지도자가 보일 수 이는 사려깊은 모습이었다.
나는 비록 그가 죽기 전에 만날 수는 없었지만 전화를 통해서 세 차례나 대화를 나누었다. 두 번은 그가 베이징의 자기 사무실에 있을 때였고(그는 인민대표로 임명되어 있었다), 한 번은 그가 해외에 있을 때였다. 당연한 일이지만 베이징에서 그의 통화는 도청되었다. 나는 이 사실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두 번째 통화가 있은 지 몇 주일 후, 아주 신중하게 편집된 우리들의 대화 내용이 중국의 언론을 통해 보도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오스트레일리아를 방문중에, 이미 약속된 시간에 감시원을 교묘히 따돌리고 독일(서독)에 있는 나와 통화를 할 수 있었다. 우리는 오래 얘기를 나눌 수는 없었지만, 그가 마음속으로는 아직도 자신의 종교와 민족과 조국에 충성을 다하고 있다는 확신을 갖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래서 그가 지나치게 많은 사업에 관심을 보인다는 좋지 않은 소식이 라사로부터 전해졌을 때에도 나는 별로 염려하지 않았다. 그가 결혼을 했다는 얘기도 들려왔다. (299~300)
다음날부터 경찰 수사를 시작했으며 무차별 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목격자들은 그들이 티벳인들의 집에 자동소총을 난사해 전가족을 몰살시키는 것을 보았다고 증언했다.
불행하게도 티벳인들은 경찰과 보안요원들을 공격함으로써 이에 맞섰다. 아주 적은 수이지만 어떤 경우에는 무고한 중국 시민들을 공격하기도 했다. 이것은 나를 아주 슬프게 했다. 어떠한 경우라도 티벳인들이 폭력에 의존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었다. 600만 우리 티벳인들에 비해서 10억이 넘는 인구를 가진 중국은 만약 그들이 원하기만 한다면 티벳인 전부를 지구상에서 완전히 없애버릴 수도 있는 일이었다. 누구든지 적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훨씬 건설적이다. 돌을 들어 분노의 대상을 향해 던지기보다는 그 분노를 잊는 법을 배우는 것이 훨씬 유익하다. 분노가 클 때일수록 더더욱 그렇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선행을 행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때는 바로 가장 커다란 역경에 처해 있을 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나는 그런 말들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비현실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것은 그들에게는 너무 지나친 요구이다. 내가 그런 끔찍한 고통 속에서 매일매일을 살아가고 있는 티벳인들에게 중국인들을 사랑할 수 있기를 기대하는 것은 잘못일지 모른다. 그러므로 나는 폭력을 용서할 수는 없지만 경우에 따라 불가피한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실제로 나는 우리 국민들의 용기를 진심으로 존경한다. 시위에 참가한 사람들 중 많은 수는 여자와 어린애들 그리고 노인들이었다. 수백 명의 남자들이 첫날 저녁에 체포되었다. 따라서 둘쨋날과 셋쨋날에 그렇게도 활발하게 자신들의 감정을 표출한 사람들은 대부분 그들의 가족들이었다. 그들 중 많은 수가 아마 이제는 죽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감옥에서 고문당하고 매맞으면서 고통스런 나날을 보내고 있다. (300~301)
(천안문 사태 당시) 정부 당국은 폭력을 씀으로써 중국 인민들 사이에 학생들에 대한 우호적인 감정을 북돋웠을 뿐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중국 공산주의의 수명을 2분의 1에서 3분의 1 가량 단축시킨 것이다. 그들은 또 자신들이 어떤 방식으로 움직이는지 전세계에 여실히 드러내었다. 중국의 인권탄압에대한 티벳인들의 호소를 비난하는 것은 이제 불가능하게 되었다. (302)
노벨 평화상이 내 개인에게는 큰 문제가 아니었지만 티벳 인민들에게는 큰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 왜냐하면 이 상의 진정한 수상자는 그들이었기 때문이다. 세계가 자비와 용서 그리고 사랑의 가치를 인정한다는 사실에 나는 만족했다. 많은 국가의 국민들이 자신들에게도 평화적인 변화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아가는 것이 기뻤다. 과거에는 비폭력적인 혁명은 관념적인 것으로 여겨졌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명백한 증거에 나는 안도감을 느꼈다.
마오 주석은 정치적인 힘은 총구에서 나온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는 부분적으로만 옳았다. 총구에서 나온 권력은 일시적일 뿐이다. 결국에는 진리와 정의, 자유와 민주를 향한 사람들의 열망이 승리한다. 정부가 무슨 일을 하든지 인간의 정신은 승리하고야 만다. (304)
그와 같은 박애정신의 실례들은 중국인들에 의한 우리 민족의 고난도 언젠가는 끝이 있으리라는 확신을 갖게 했다. 왜냐하면 수억의 중국인들 중에서 어느 한 순간에라도 잔학행위에 참여한 사람은 수천 명에 지나지 않는 반면, 수백만의 사람들은 선행을 베풀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306)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자신들이 경찰이 시위진압시 사용하는 전기봉으로 고문받았는가를 얘기했다. 한 젊은이는 그들이 전기봉을 자기 입 속에 집어넣어서 입 속이 다 부르텄다고 했으며, 한 비구니는 취조관들이 이 도구를 자신의 항문과 질 속에 집어넣어 고문했다고 말했다.
이러한 자료들을 열거해 중국인 전부를 매도하는 것은 유혹적이기는 하지만 옳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그러한 만행이 잊혀져서는 안 된다. 나는 비록 내 인생의 거의 대부분을 망명지에서 살아왔으며, 항상 중국인들의 문제에는 민감한 관심을 지녀왔지만(그 결과 나는 ‘중국 관측통’으로 제법 관록이 있다) 아직도 중국인들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307)
비록 공산주의가 ‘인민’에 봉사한다고 공언하지만 그 ‘인민’이라는 말은 모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견해와 의견을 같이하는 소수의 사람들만을 의미한다는 데 문제가 있는 것 같다. (309)
그들은 모든 사람과 모든 것을 의심하게 되고, 의심은 끔찍한 불행의 시발이 된다. 왜냐하면 의심은 기본적인 인간 본성에 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한 인간이 다른 한 사람을 믿고 싶어하는 욕망은 인간에게 가장 본질적인 부분이다. (309)
만약 내가 어떤 정치적인 신념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나는 아마 절반쯤 마르크스주의자일 것이다. 자본주의가 인간적인 모습으로 실현되기만 한다면 아무런 반대도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나의 종교적인 믿음은 나로 하여금 사회주의와 보편주의로 가게 만든다. 그것들은 불교의 원리들과 보다 잘 어울린다. 마르크스주의의 다른 매력은, 인간이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불교도들의 생각과 일치한다.
그러나 민주적인 체제하에서 자본주의적인 정책을 추구하는 국가들이 공산주의 이상을 추구하는 국가들보다 훨씬 자유롭다. 그래서 나는 궁극적으로 사회 전체에 봉사할 수 있는 인도적인 정부를 좋아한다. 어린이나 노인들, 그리고 장애자들까지도 사회의 생산적인 구성원이 될 수 있다.
절반은 마르크스주의자라고 말하면서도 정작 투표를 하게 된다면 나는 아마 환경보호론자들의 정당에 표를 던질 것이다. 최근 세계의 아주 긍정적인 발전 중 하나는 자연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의 증대이다. 자연은 성스럽고 신성한 무엇은 아니다. 우리들이 지구를 돌보는 것은 그저 우리의 가정을 돌보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들은 자연에서 왔으며 자연에 대적할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환경은 종교나 윤리, 도덕의 문제가 아니라고 내가 말하는 이유이다. 그러한 것들은 장식물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것들 없이도 생존할 수 있지만, 만약 계속 자연에 대해서 적대적이 된다면 생존조차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점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만약 우리가 자연의 균형을 파괴한다면 우리 인간은 고통받게 될 것이다. 나아가 현재의 우리는 미래의 세대들도 생각해야만 한다. 깨끗한 환경은 다른 어떤 것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이 향유해야 할 권리이다. 따라서 우리가 후손들에게 물려주는 세계가 우리가 그것을 물려받았을 때보다 더 건강하지 못하다 해도 최소한 그만큼은 건강하게 유지시켜야만 하는 것이 우리들의 책임이다. 이것은 그리 어려운 제안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 개인적으로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지만 우리 모두가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작은 일일지라도 우리는 개인적으로라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만 한다. 방을 나갈 때 불을 끄는 일은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일지는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가 그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인간은 어떤 의미에서 지구의 자식들이다. 이제까지는 우리들의 어머니가 자식들의 행동을 잘 참아왔지만 최근에 와서는 그녀의 인내가 한계에 도달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309~310)
한 승려로서 나의 관심은 전 인간 가족의 구성원들에게 걸쳐 있다. 다시 말해 모든 고통받는 중생들에 대한 나의 관심과 배려는 지대하다.
이러한 고통은 무지에 의한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행복과 내적인 평화와 만족감에서 오는 것이다. 이런 내적인 평화와 만족감은 타인에 대한 사랑과 자비를 기르고, 분노와 이기심 그리고 탐욕을 없앰으로써 함양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 말이 지나치리만치 소박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들에게, 지구의 어느 귀퉁이에서 왔건 근본적으로 우리는 모두 같은 인간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싶다. 우리는 모두 행복을 추구하며 고통을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공통적이고 기본적인 요구와 관심들을 가지고 있다. 나아가 우리 인간은 모두 자유를 원하며 우리들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권리를 원한다. 그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311)
우리는 우리들이 공유하고 있는 지구와 서로에 대한 선의와 깨달음에 기초한 보편적인 책임의식을 계발할 필요가 있다.
나는 내가 믿고 있는 불교가 사랑과 자비심을 길러주는 데 유익하다고 느껴왔지만 이러한 속성들은 종교를 믿건 믿지 않건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발전될 수 있는 것이라고 확신한다. 나는 또 모든 종교는 같은 목표를 추구한다고 믿는다. 선을 장려하고 모든 인간들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모든 종교의 목적이라고 믿는다. 비록 방법은 달라 보일지 모르지만 목적은 다 같다고 본다.
우리들의 삶에서 과학기술의 영향이 증대하는 것과 더불어 종교와 그 밖의 정신적인 영역들은 우리 자신들의 인간성을 상기시켜 주는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양자 사이에는 아무런 모순도 없다. 양자는 각각 서로에 대한 통찰을 우리에게 가져다준다. 과학과 붓다의 가르침은 둘 다 모든 것들의 근본적인 통일성을 말해주고 있다. (311)
우리도 더 평화롭고 더 인간적이며, 더 아름다운 세계를 건설하는 데 기여하고 싶다. 미래의 자유로운 티벳은 어려운 자를 돕고, 자연을 보호하며, 평화를 보존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사소한 것일지는 모르지만, 정신적인 것들과 실제적이고 실용적인 태도를 융합시키는 티벳인들의 능력이 특별한 기여를 할 수 있으리라고 나는 믿는다.
끝으로 나는 나에게 깊은 감명을 주는 짧은 기도문 한 구절을 여러분들과 함께 음미해 보고 싶다.
세상이 계속되는 한,
그리고 생명이 존재하는 한,
그때까지 나도 살아
이 세상의 온갖 고통을 물리치리. (312)
출처 : 박근형의 티베트 사천 자료실
글쓴이 : berdl28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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