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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달라이 라마 자서전「유배된 자유 (Freedom In Exile)」[3]

chomice 2008. 1. 2. 16:09
제5장 - 공산당 지배하의 중국

다시 중국으로 여행을 계속하려고 할 때, 좀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거기에는 티벳 수호신을 조각한 석상이 있었다. 물소 머리 형상의 그 석상이 아주 기민하게 움직였다. 처음에 보았을 때는 표정을 감춘 채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동쪽을 바라보며 매우 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가 망명길에 오를 즈음에는 간덴에 있는 한 절의 벽이 피로 물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가 종교를 미신이라고 단정하는 데 대하여 나는 무엇인가를 진리로, 혹은 허위로 받아들이기 전에 그것에 관해 철저히 탐구해야만 한다는 붓다의 교설을 인용했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있어서 종교는 본질적인 것이며, 특히 정치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그러하다고 얘기해 주었다. (107)

나는 중국과 티벳이 제휴할 가능성을 엿보고 몹시 마음이 들떴다. 마르크스의 사상을 자세히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들었다. 그것은 만인에 대한 평등과 정의에 기초한 사상으로서 전세계적 병폐에 대한 만병통치약이나 되는 듯했다. 내가 볼 때 이론적인 견지에서 본 마르크스주의 유일한 결점은 인간 존재에 대한 유물론적 시각이었다. 나는 그 경직성에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공산당원이 되고 싶다는 뜻을 비쳤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만 나는 정치를 하는 데 있어 효율적인 방편이 될 마르크스주의 순수 교의와, 불교를 종합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었다. (110)

그러나 마오가 참석한 회의는 달랐다. 그의 연설은 마력적인 데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훌륭한 점은 그가 연설을 할 때는 청중들의 견해를 빠짐없이 경청한다는 것이다. 그는 주어진 문제에 대해 대중들이 마음속에 품고 있는 생각을 듣기 위해 언제든지 귀를 열고 있었으며, 어떠한 얘기를 해도 수용하였다. 심지어 그는 자기 자신을 비판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언젠가 집회에서 소기의 성과를 얻지 못했을 때, 그는 지방 공산당 당국의 처사를 비난하는 자기 고향 사람들의 편지를 보여주었다. 그것은 매우 극적인 장면이었으나 나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이러한 집회의 상당 부분이 조작되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인민들은 자기 생각을 말하기를 두려워했으며 비당원의 경우 특히 더 그러했다. 그들은 당원들의 비위를 맞추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나는 중국의 정치활동이, 정확한 원인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모순에 차 있다는 것을 점차 깨닫게 되었다. (111)

그(마오 저뚱)는 몇 가지 문제에 대해 나와 개인적으로 얘기하려고 찾아왔던 것이다. 그는 얘기 도중에 ‘붓다’에 대해 호의적인 얘기를 해서 나를 놀라게 하였다. 붓다가 계급을 부정했으며, 인간성의 타락을 거부하고, 또한 착취를 반대했다는 점에서 훌륭하다는 얘기였다. (111)

저우 언라이(주은래)는 한마디로 전혀 다른 부류의 사람이었다. 리우가 침착하고 근엄한데 반해, 그는 항상 웃음을 머금고 있었으며, 매력적이고 재치가 넘쳤다. 실상 그는 지나치리만치 공손했는데 그것은 이 세상 어느 누구도 믿지 않는 사람들의 전형적인 특성이었다. (112)

내가 만난 몇몇 중국 공산주의자들은 대단히 좋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이익을 돌보지 않고 남에게 봉사하는 사람들이었고, 개인적으로 나도 많은 도움을 받았다. 나는 그들한테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113)

마지막으로 그(마오 저뚱)는 가까이 다가와서 이렇게 말했다. “당신의 태도는 훌륭합니다. 그러나 종교는 독약과 같습니다. 첫째, 비구승이나 비구니가 독신이기 때문에 인구를 감소시킵니다. 둘째, 그것은 물질적인 발전을 도외시합니다.” 이 말을 듣고 나는 끓어오르는 격한 감정 때문에 온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나는 마음속으로 외쳤다. ‘그래서 당신은 다르마의 파괴자일 수 밖에 없는 것이오.’......
......두렵고 놀라운 감정이 가시자 이번엔 의심이 꼬리를 이었다. 어떻게 해서 그는 내 감정을 간파하지 못했던 것일까? 왜 그는 종교가 나의 삶의 핵심에 들어있다는 점을 헤아리지 못했을까? 왜 그는 종교가 나의 삶의 핵심에 들어있다는 점을 간파하지 못했던 것일까?......내가 하루에 적어도 네 시간 이상을 기도와 명상으로 보내며, 중국에 체류하는 동안에도 빠짐없이 교사들로부터 종교학습을 받는다는 사실을 그가 몰랐을 리 만무하다. 그는 또 내가 그 당시 최종 승단시험에 합격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았을 것이다......
......아마 그가 과학기술과 물질적 진보에 대한 나의 남다른 관심을 잘못 진단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중국을 모델로 하여 티벳을 현대화시키고자 하며, 나의 사고방식이 근본적으로 과학적이라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리고 그가 불교철학에 대해 무식해서, 다르마를 수행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스스로 다르마의 타당성을 검증해야 할 것이라는 붓다의 가르침을 알지 못했다는 것도 나의 의문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붓다의 가르침을 따라 나는 현대 과학의 진리에 대해 개방적이었던 것이다. 아마 이것이 마오로 하여금 나의 종교적 수행이 단지 오랜 관습쯤인 것이라 생각하게 했던 것 같다. 그의 추론이야 어떻든 간에 그는 나를 완전히 오판했던 것이다. (120~121)

마오에 대해서는 종전과는 달리 생각이 많이 바꾸긴 했지만 그래도 그는 위대한 지도자이며 진실한 사람임에는 틀림없었다. 그는 속임수에 능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티벳에 파견된 그의 관리들이 그의 지시를 어기지 않고, 그들에 대한 마오의 통제력이 건재 하는 한 티벳의 미래는 낙관적이라는 믿음을 가질 수 있었다. 내 입장도 마찬가지였다. 긍정적인 시각으로 상황에 대처해 나가는 것이 가장 현명한 태도라고 생각되었다. 부정적인 태도를 취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그것은 사태를 악화시킬 뿐이었다. (121)

티벳에 파견된 중국 당국자들의 나에 대한 태도는 아주 흥미로웠다. 언젠가 중국 관리 한 사람이 내게 말했다. “중국인들은 티벳인들이 달라이 라마를 사랑하는 것만큼 마오 주석을 사랑하진 않습니다.”


제6장 - 네루의 후회

중국 당국은 이 비옥한 지역에 떠돌아다니는 수많은 유목민들을 붙잡아들이기 시작했다. 우리의 새로운 지배자들이 보기에 유랑생활은 야만적이어서 비위에 거슬렸다. [중국인이 일반적으로 티벳인들을 가리킬 때 쓰는 ‘만쭈(蠻族)’라는 말도 사실 야만인을 뜻한다.] (126)

1956년 초, 로사 축제 동안에 나는 흥미있는 네충 신탁을 받았다. 이에 따르면 ‘희망을 이루어 주는 보석(티벳인들이 달라이 라마를 일컫는 이름들 중의 하나)이 서쪽에서 빛나리라’는 것이었다. 지금은 그 예언이 더 깊은 뜻을 함축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나는 그것을 내가 그해에 인도를 방문하게 되리라는 뜻쯤으로 받아들였다. (127)

마침내 레팅 사원에 도착하여 그곳의 가장 중요한 신상(神像) 앞에서 경의를 표하고 있을 때, 지금 기억으로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나는 매우 흥분되었다. 아주 오래 전부터 내가 그곳과 어떤 연관이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 이후로 나는 레팅 사원에 암자를 하나 짓고 거기에서 여생을 보내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했다. (132)

다음날 아침, 나는 자무나 강 둑에 있는 라즈그하트를 참배했다. 그곳은 마하트마 간디가 화장된 곳으로서 매우 조용하고 아름다웠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외국의 지배를 겪어야 했던 민족의 손님이 되어 그곳에 서 있다는 사실이 감개무량했다. 또한 마하트마의 비폭력주의 ‘아힘사’를 채택한 나라에 와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나는 서서 기도하는 중에, 간디를 만나볼 수 없다는 슬픔을 느낌과 동시에 그의 위대한 삶이 보여준 교훈을 되새기며 행복을 느꼈다. 나에게 있어서 마하트마는 자신의 어떠한 사적 이해보다도 타인에 대한 사랑을 우선으로 했던 완전한 정치가였다. 나는 또한 그의 헌신적인 비폭력주의가 유일한 정치적 해결책이었다고 확신했다. (139)

항상 나와 동행했던 판첸 라마는 우리의 불행한 상황을 끊임없이 나에게 주시시켰다. 그는 더 이상 내가 전에 알고 있던 예의바르고 겸손한 소년이 아니었다. 중국인들에 의해 그의 여린 마음에 가해진 끝없는 압박이 불가피하게 영향을 준 것이었다. (141)

나는 신탁에 의뢰했다. 달라이 라마가 조언을 구할 수 있는 세 명의 신탁승이 있다. 그 중에서도 네충과 가동이 참석했다. 둘 다 내가 돌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내가 신탁을 구하고 있을 때 루캉와가 왔다. 신탁승은 화가 나서, 그에게 밖에 나가 있으라고 했다. 신탁승은 마치 루캉와가 결심한 바를 아는 듯했다. 그러나 루캉와는 그를 무시하고 앉아 있었다. 나중에 그는 나에게 다가와서 이렇게 말했다. “인간은 절망적이 되면 신을 찾습니다. 그러나 신은 절망적이 되면 거짓말을 합니다.” (144)

비록 그때는 중국에 대항하는 무력투쟁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지만, 형들은 내가 모르게 이미 미국 CIA와 접촉하고 있었다. 분명 미국은 티벳의 자유투사들에게 조금이나마 원조를 해줄 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기고 있을터였다. 그것은 미국이 티벳 독립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모든 공산정권을 약화시키려는 그들의 범세계적인 노력의 일환이었다. 이를 위해 그들은 자유투사들에게 얼마 안 되지만 간단한 무기들을 공수해 주었다. 형들은 또한 CIA로 하여금 몇몇 자유투사에게 게릴라전술을 가르쳐주게 하여 그들이 낙하산을 통해 티벳에 잠입하는 계획도 세워놓았다. 당연히 형들은 나에게 이 사실을 알리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고 판단했다. 형들은 나의 반응이 어떨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형들의 논리는 충분히 이해하지만 받아들일 수 없다고 설명했을 때, 걀로 툰둡 형은 동요의 빛을 보이기 시작했다......결국 나는 네루의 충고와 저우 언라이와의 약속에 따라 티벳으로 돌아가 다시 한 번 중국인들에게 기회를 주기로 결심했다. (145)

제7장 - 망명

......너무 끔찍해서 나는 몇 년 동안 그 이야기들을 믿을 수 없었다. 주민들을 위협하기 위해 중국인들이 사용한 방법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가증스러운 방법이었다. 1959년에 국제사법위원회의 보고서를 읽고 나서야, 나는 내가 들었던 이야기들을 사실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십자가 형(刑), 생체해부, 희생자들의 창자를 들어내거나 손발을 자르는 일은 보통이었다. 심지어 그들은 머리를 베거나 태워 죽이고, 죽을 때까지 때리거나 산 채로 매장하기도 했다. 말 뒤에 사람을 매달고 죽을 때까지 달리게 했으며, 거꾸로 매달아 놓거나, 손발을 묶은 채로 얼음물 속에 던져넣었다. 그리고 희생자들이 ‘달라이 라마 만세!’를 위치는 것을 막기 위해 형장으로 가는 도중에 그들의 혀를 손으로 찢었다. (148)

6백만 티벳 국민들에 대한 나의 책임과 의무감에 가슴이 무거웠다. 그것은 나의 신앙이기도 하였다. 매일 아침 일찍 고요한 축복 속에 불상이 안치되어 있는 오래 딘 제단 앞에 앉아서 예불을 올리면서, 나는 모든 유정(有情)들을 위해 동체대비심(同體大悲心)을 발하기 위해 마음을 집중하였다. 나는 우리의 적이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의 가장 훌륭한 스승이라는 붓다의 가르침을 되새겼다. 그리고 이러한 가르침을 지키기가 힘들지라도 나는 결코 그들이 나의 스승이라는 생각을 의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153)

내가 네충 신탁을 요청한 것은 이때쯤이었다. 신탁승들이 급히 소집되었다. 내가 티벳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가, 국외로 탈출해야 하는가? 내가 어떻게 처신하면 좋을 것인가? 신탁은 내가 티벳에 머무르면서 중국측과 계속 대화를 해나가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밝혔다. 나는 그것이 최선의 길인가 의심하였다. 나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는 신도 거짓말을 한다는 루캉와의 말을 떠올렸다. 그래서 나는 그날 오후 모[일종의 점(占)이다]를 해보았다. 결과는 같았다......답장을 보낸 후 나는 무엇으 해야 할지 난감했다. 그 이튿날, 나는 다시 신탁을 구했다. 놀랍게도 영매(靈媒)는 내게 이렇게 외쳤다. “가라! 오늘밤 당장 가라!”고. 영매는 최면상태에서 깨어나지 않은 채 비틀거리며 걸어나오더니 종이와 펜을 잡아채어서 무엇인가를 쓰기 시작했다. 거기엔 내가 노르블링카를 벗어나 인도와의 국경지대에 있는 마지막 티벳 변방 마을로 가는 길이 명확히 그려져 있었다. 그 길은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통로였다. 다 쓰고 나자 영매인 승려 롭상 직메는 얼굴이 창백해진 채 쓰러졌다. 그것은 도르제 드라그덴이 그의 몸을 떠났음을 의미했다. 바로 그때 신탁의 계시를 강조하기라도 하듯 보석공원 북쪽 문 밖에 있는 습지에서 두 발의 박격포탄이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31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그때의 일을 회상해 보니 드라크덴은 내가 17일에 라사를 떠나리라는 것을 미리부터 알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미리 말하지 않은 것은 그 얘기가 새어나갈까 저어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미리 계획되어 있지 않았으니 비밀이 샐래야 샐 수가 없었던 것이다. (160~161)
출처 : 박근형의 티베트 사천 자료실
글쓴이 : berdl28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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