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 출처 : 월간 『붓다』2000년 10월호 (통권 제 152호)
글쓴이 : 주 민황 (동국대 인도철학과 강사)
지금 세계에 티베트 불교 열풍이 불고 있다는 말이 이제는 한국 사회에도 적용되기 시작하는 것 같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달라이 라마에 대한 관심이 확산되고 있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달라이 라마나 티베트 불교에 대해서 호기심은 있지만 잘 알지 못하는 분들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그런 분들을 위해서 제가 아는 만큼 설명해 드리지요.
티베트에는 서기 7세기 전반에 불교가 처음으로 소개되어 불상을 모실 사원을 지었지만, 불교 교리가 일반인들에게 전해질 시기는 익지 않았었습니다. 8세기 후반에는 불교가 국교로 정해지고, 인도와 중국에서 불경을 가져와서 티베트어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주로 인도에서 온 경전들이 번역되었습니다. 국교로 정해졌으나, 온국민을 불교도로 만드는 데는 2백 년이라는 기간이 필요했습니다. 불교 이전에 티베트 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토속종교인 '본(Bon)'교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으니까요. 그런 와중에도, 8세기 중반부터 9세기 중반까지 약 백 년 동안을 왕이 중심이 되어 대대적인 역경사업을 벌이고, 경제적으로 사원을 후원하고 승려들을 양성했기 때문에 불교가 단단히 뿌리내릴 기반을 마련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기득권을 가졌던 토속종교가 불교에 밀리면서 반발이 일어났고, 왕의 세력확장을 저지하려는 귀족세력이 토속종교의 반발세력과 결탁하여 불교를 신봉하는 왕을 암살하면서 9세기 중반부터 10세기 중반까지는 불교의 암흑시대가 되었습니다. 통일왕조는 무너졌고, 티베트는 무정부 상태의 많은 군소세력들로 쪼개졌습니다. 사원은 모두 파괴되고, 승려들은 강제로 환속당했습니다. 그 시기에는 정상적인 불교 수행이 불가능했습니다. 불교에 관심있는 사람들은 몰래 경전을 구해 자의적으로 해석하거나 그릇된 해석으로 인해 타락한 생활을 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막행막식을 하면서 수행이라고 둘러대듯이 말입니다. 티베트인들은 이제 올바른 지도자가 없이는 불교 수행을 올바르게 할 수 없다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10세기 후반부터 불기 시작한 불교 재정비운동은 11세기 초에 아티샤 스님이 인도에서 티베트로 온 이래로 자리잡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후부터 티베트에 전개된 불교는 자격을 갖춘 스승에게서 정확하게 배운 불교를 수행하는 것을 중요시하게 되었습니다. 자격있는 스승을 '라마'라고 부릅니다. 자격있는 스승이란 불교 수행에 대해서 정확히 알고 수행해서 남에게 가르쳐 줄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을 말합니다. 그래서 승려복을 입었다고 해서 모두 '라마'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티베트 승려들을 모두 라마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달라이 라마도 그런 자격을 갖추었기에 라마라고 부릅니다. 티베트 사회에서는 '라마'라는 호칭을 붙일 수 있는 사람이 그렇게 흔하지 않습니다. 남에게 수행을 전수할 수 있을 만큼 수행에 대해서 잘 알고 직접 체득한 사람이 그리 흔하지는 않으니까요.
안다고 해서 모두 체득한 사람들은 아닙니다. 그래서 '라마'라는 호칭은 지극한 존칭입니다. 라마의 지도 아래 수행을 하기 때문에 수행자들은 자의적으로 해석해서 빗나가는 일을 방지하고, 목적지를 향해서 헤매지 않고 차근차근 곧바로 나아갈 수 있는 안내지도를 가진 셈입니다. '라마'는 불교수행을 안내하는 스승의 역할을 합니다. 티베트 불교는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과 승보의 삼보에게 귀의하는 불교입니다.
그들이 기도문에서 삼보에 귀의하기에 앞서서 '라마에게 귀의합니다.'로 시작하는 것은 라마의 마음을 부처님의 마음으로, 라마의 말씀을 부처님의 말씀으로, 라마의 신체를 부처님의 신체로 생각하면서, 살아있는 라마를 살아있는 부처님으로 생각하고 귀의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스승에게서 부처님을 보는 것입니다. 그것을 라마라는 개인을 숭배하는 것이라고 오해하지 마십시오.
라마를 통해서 살아있는 부처님을 보는 것입니다. 따라서, 라마에게 귀의한다는 것은 부처님의 마음과 말씀과 행동에 귀의한다는 말입니다. 티베트 불교를 '라마교'라고 부르는 실례를 저지르지 마시기 바랍니다. 티베트에는 라마교라는 말이 없습니다.
라마교는 중국인들이 티베트 불교를 얕보기 위해서 만들어낸 말입니다. 어쨌든, 재정비된 티베트. 티베트 불교 수행에서 필수적인 것들은 (1) 윤회를 벗어나 완전한 행복을 이루어야겠다는 열망과, (2) 모든 중생이 해탈하도록 돕겠다고 서원하는 보리심과, (3) 모든 것이 인연에 의해서 생겼다가 사라지는 연기법의 소산일 뿐이지 변하지 않고 영원히 존재하는 것은 없다는 '공성(空性)'을 이해해야만 윤회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기본적인 가르침들입니다.
티베트인들은 윤회를 철저히 믿기에 이 생에만 급급하지 않습니다. 윤회를 믿는 불교도들은, 이 생에 죄를 짓더라도 죽으면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는 무책임한 생각을 할 수 없습니다. 윤회가 있기에 이 생을 더 성실히 살아야 하고, 다음 생의 발전에 희망을 걸고 살 수 있습니다. 완전한 평화와 행복의 상태인 열반에 도달할 정도로 마음이 정화될 때까지 중생은 업력에 밀려서 계속해서 윤회 속에 태어나게 됩니다. 지금의 내 모습은 전생의 내 업력이 만들어놓은 것입니다.
다음 생의 내 모습을 나는 지금 이 생에서 준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내가 불행하다고 해서 남을 원망할 일이 아닙니다. 모 종교에서도 '내 탓이오, 내 탓이오.' 하며 가슴을 치는 것도 업의 탓으로 돌리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내가 만든 업의 탓으로 지금 이 고통을 받고 있으니까 당당하게 벌을 받고, 다음에는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행복해지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공덕을 쌓고 사는 것이 불교도의 수행입니다. 윤회를 믿지 않으면 다음 생까지 바라보는 긴 안목의 수행을 하는 것이 어렵겠지요. 우리 사회는 윤회나 인과응보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기에 한탕주의가 만연하는 것이겠지요.
티베트인들은 윤회를 철저히 믿기에 이 생에서 차근차근 공덕을 쌓고 수행을 한 다음에, 다음 생에는 더 잘 준비된 상태에서 수행을 하게 된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수행하는 목적이 윤회에서 고통받는 모든 중생들을 도와서 부처님의 경지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모든 중생이 수많은 전생을 통해서 언젠가 한번쯤은 내 어머니였을 가능성이 있으니까, 그들이 나를 보살펴주었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 그들을 최고의 행복한 상태인 부처님의 경지에 오르게 하고 싶다는 열망을 갖고, 그들을 돕기 위한 방편으로 부처님의 지혜를 얻으려고 합니다. 성불하려는 목적이 중생을 돕기 위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마음으로 기도하고 계시는지요?
어차피 기도할 바에 크게 욕심내고 하십시오. 내 가족들만의 행복이 아니라, 모든 중생이 행복해지기를 바라면서 기도한다면 같은 투자를 하고도 훨씬 큰 이익을 가져오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런 면에서 티베트인들은 아주 현명합니다. 이기심과 개인주의가 팽배한 서양사회에 환멸을 느낀 서양인들이 티베트 불교에 매혹된 것은 모든 중생들을 어머니처럼 생각하고, 남들의 행복을 우선적으로 기원하도록 가르치는 티베트 불교에서 마음의 평화와 삶의 의미를 찾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 티베트 불교는 인권의 평등함을 주장하고, 모든 중생이 지구에서 행복하게 살 권리를 동등하게 갖고 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티베트 불교는 현대사회의 심각한 환경문제를 해결하는 데도 도움을 줍니다. 서양에 티베트 불교 열풍을 몰고온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는, 티베트 불교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사는 겸손하고 따뜻한 마음을 지닌 티베트 수행자들이 서양인들에게 좋은 본보기를 보인 점입니다. 실천하지 않는 가르침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티베트 불교가 서양에 확고하게 자리잡게 된 것은 달라이 라마의 영향이 가장 크지만, 많은 티베트 수행자들이 티베트 불교센터들을 세계 곳곳에 세워서 서양인들에게 티베트 불교를 가르치고, 모범적인 삶을 실천하고 있는 것도 큰 몫을 할 것입니다.
결국, 종교가 사회에 뿌리 내리려면 그 종교를 믿는 사람들에게 바람직한 삶의 모습을 제시함으로써 수행의 희망을 주어야 합니다. 티베트 불교를 수행한 사람들이 겸손해지고, 다른 중생에 대한 책임감을 갖게 되고, 집착을 줄이고 마음의 평화를 얻게 되는 실제적인 결과를 얻기 때문에 서양인들은 티베트 불교에 열광하는 것이며, 일시적인 유행으로 끝나지는 않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