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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인종주의와 소수 민족들의 저항

chomice 2008. 1. 2. 16:02

인종주의와 소수 민족들의 저항


 

찰리 호어(Chalie Hore)의 『바로 보는 중국 현대사 -
20세기 초에서 천안문사태 이후까지』(풀무질 펴냄) 중에서

 

 

중국에서의 민족 문제는 러시아에서처럼 중심적인 중요성을 띠어본 적이 없었다. 공식 통계에 따르면, 중국 인구의 93% 이상이 한족(漢族)이다. 많은 소수 민족의 민족주의자들은 이 통계 수치가 너무 낮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맞을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수치가 현실보다 과장되어 있다.10개의 주요 소수 민족 가운데 4개(가장 큰 한 집단을 포함하여)는 일상 언어나 관습에서 한족과 거의 차이가 나지 않을 정도로 철저하게 동화되었다. 예컨데, 1982년 인구 통계는 만주족을 430만 명으로 책정했지만, 만주어는 20세기 대부분의 시기 동안 동북부 지역에서 소멸되었다. 만주어를 쓰는 가장 큰 단일 집단이 신강성 최서단의 계곡에 살고 있었는데, 이들은 18세기에 거기서 주둔한 변경 수비대의 후예들이다.

 다른 민족들도 인구가 희박한 그들의 정주 지역으로 한족이 이주해와 본거지조차 소수로 전락함에 따라 강제 동화될 운명에 직면했다. 예를 들면, 내몽고에서 몽고인은 이제 인구의 20%도 안된다. 공식적으로 중국 정부는 항상 소수 민족들의 고유의 언어와 관습을 유지하고 발전시키도록 장려해 왔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온정주의에서 노골적인 인종주의에 이르는 다양한 방책이 구사되고 있다.

 

 

 회교도들의 저항

 

 

 회교도들과 티베트인들이 주로 저항하는 집단이다. 중국의 1,500만 회교도는 여러 민족들로 나뉘어져 있다. 그 가운데 대체로 절반은 민족학상으로나 언어학상으로나 중국인이지만, 공식적으로는 소수 민족(回族)으로 분류되는데, 그 이유는 오직 그들의 종교 때문이다. 나머지 대부분은 위구르인이지만, 그러나 상당수의 카자흐인과 키르기즈인이 있으며 이들은 러시아 접경지대에 산재한 훨씬 더 큰 집단들과 긴밀한 연관을 유지하고 있다.

 회교도의 다수가 살고 있는 신강성은 18세기에 와서야 중국에 병합되었고, 여전히 이곳은 사실상 식민지(신강[新疆]이라는 이름 자체가 '새로운 영토'를 의미한다)로서 지배되고 있다. 1950년 홍군이 정복군으로서 입성했을 때 몇 년 동안 성 북부에서 무장 저항이 있었다. 강제 집산화(유목민을 정착촌에서 강제로 살게 한 것도 여기에 포함된다)의 충격과 대약진 운동의 재앙은 몇 차례에 걸친 유산된 반란을 촉발시켰고, 한편에서는 6만 명 이상의 카자흐인들이 러시아 국경 너머로 도망가는 일도 있었다.

 문화혁명 기간 동안, 모스크(회교사원)는 강제로 폐쇄당했고, 기도가 금지되었다. 한편 위구르어와 카자흐어에서 사용하는 아랍 문자와 키릴 문자가 폐지되고 로마 문자로 대체되었다. 1980년초에 회교도의 분노가 공공연한 전쟁으로 터졌다. 1980년 4월에 위구르 어린이가 살해된 뒤 이틀간의 폭동이 악수시에서 일어났다(회교도들은 또한 그 해 말 같은 악수시에서 있은 상해 청년들의 항의 시위에 가담하기도 했다). 그 이듬해 카슈가르 시에서 일어난 한 위구르인에 대한 발포는 수천명의 회교도들을 가두 투쟁으로 끌어들여 경국 군대가 투입되는 사태로 이어졌다.
그런 일이 있고 난 뒤, 상당한 자유화가 진행되었다. 예 사원이 다시 문을 열고 새 사원이 설립되었다. 아랍어 사용 금지 조치는 폐기되었다. 제한된 인원이지만 메카 순례도 허용되었다. 새롭게 편집된 코란이 발간되었다.(러시아의 회교도들은 이제 그들으 언어로 쓰인 코란 책자를 중국에서 수입한다).

 이러한 양보 조처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인종주의아 경제적 낙후성이 두 가지에 대한 회교도의 분노는 계속 끓고 있었다. 1985년 12월에 1천 명 이상의 학생들이 우르무치에서 핵실험 반대(중국의 핵실험장과 폐기장은 대부분 신강성에 있다)와 가족계획 정책에 반대하는 시위를 펼쳤다. 그 다음 달 신강성에서 온 학생들은 북경에서 동조 시위 행진을 벌였다. 소수 민족계 학생들은(특히 북경에서 유학하는 학생들) 정부 내 상직정 직위를 맡기 위해 훈련을 받고 있는 엘리트들이다. 그런 학생들조차 중국의 지배에 반대하여 항의 운동에 나섰다는 사실은 신강성의 반중국 감정이 얼마나 뿌리깊은가를 잘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시위들은 1989년의 천안문 항의 운동 때 일어났다. 시위는 소수 민족들의 성 관습에 관한 책을 둘러싸고 시작되었는데, 그 책은 회교도를 조잡하게 모독하는 내용이었다. 1989년 5월 12일에 북경에서 2천 명의 시위대가 그 책의 판매 금지를 요구하는 항의 행진을 벌였다. 다음날 1만 명 이상이 난주(蘭州)에서 항의 행진을 했고, 거기서 뒤이어 폭동이 일어났다. 정부의 응답은 신속했다. 성서성에서는 5월 15일까지 9만 권의 책을 관리들이 소각했다. 그러나 같은 날에 회교도의 시위로서는 최대 규모인 거의 10만 명이 청해성(靑海省)의 5개 시·읍에서 행진을 했다(청해성의 공식 인구는 4백만을 약간 넘는다). 우르무치에서는 수천 명이 “돌멩이와 쇠파이프를 들고 지방 당 본부와 무장 경찰대를 공격했다.” 이틀 후 정부는 그 책을 전국적으로 판매 금지했다.

 이것은 1930년대 이래 중국에서 일어난 최초의 범이슬람 운동이었다. 이전의 반란들은 잘해야 위구르와 카자흐가 연합하는 수준이었다. 이번에는 운동이 확산된 것으로 볼 때 회교도의 상당수가 그 운동에 연루되었음에 틀림없다. 1970년대와 1980년대초 이슬람 근본주의의 발흥 때도 중국이 무사히 넘어간 것은 중국 회교도의 90%가 수니파인 탓도 있지만, 더 큰 이유는 국가가 종교 지도자들을 능수능란하게 매수했기 때문이다. 중국 정부의 재빠른 대응은 그러한 운동의 잠재적 힘에 대한 그들의 두렴움이 어느 정도인지를 보여주었다.

 회교도 운동이 반정부 운동과 어느 정도나 융합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지만, 그러나 항의 운동이 전반적인 반란 분위기에 고무받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또 국가가 서둘러 양보한 것이 항의 운동에 참가한 모든 이들에게 자신감과 용기를 주었을 것이라는 것도 분명하다. 확실한 사실은 회교도들의 분노가 천안문 학살 이후 사라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1990년 4월에 카슈가르 근처의 조그마한 도시에서 무장한 이슬람 분리주의자들과 경찰 사이에 적어도 22명의 사망자를 낸 심각한 전투가 있었다. 그 전투가 일어난 것은, 이슬람 근본주의자들과 민족주의자들의 선동이 세를 더하고 있다는 보고가 몇 달간 계속되고 난 뒤였다.

 

 

 티베트 민족의 저항

 

 그러나 중국 지배에 반대하는 민족주의적 반란의 중심은 여전히 티베트의 반란이다. 티베트인들은 다른 어떤 소수 민족보다도 더 중국 지배로 인해 고통 받았고, 그리하여 1950년대 중반 이래 저항이 계속되었다. 공산당 관리가 티베트에 처음 들어온 것이 1951년인데, 초기에는 티베트의 기존 지배계금을 통해 그 지역을 통치하고자 했다. 1956년부터 공공연한 게릴라전이 티베트 동부(지금은 사천성의 일부)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그러자 중국군이 티베트 전역을 점령하고 군정과 분할을 강요하였다. 대부분의 티베트인은 이제 인근의 운남(雲南)성, 사천성 그리고 청해성으로 편입된 지역들에 흩어져 살고 있다. 당시 약 5만 5천 명이 티베트의 정치적·정신적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를 따라 망명하였다.

 그 이후로 티베트는 중국에 의해 거의 배타적으로 지배받아 왔다. 1979년에 처음으로 티베트인이 정부의 상급직에 임명되었다. 티베트에 사는 중국인의 단 10%만이 티베트어를 말하며, 티베트인 가운데 10%만이 중국어를 할 줄 안다(이것만으로도 티베트인이 점령에 관해 어떻게 느끼는지를 알 수 있다). 항상적으로 '한족 국수주의'를 공격하는 공식 문서들도 인정하듯이, 사실상 거의 모든 중국인이 티베트인과 티베트 문화를 인종주의적 경멸로서 대한다. 그리고 티베트인들은 농사 이외의 모든 직장에서 체계적인 차별에 직면한다.

 중국 점령 이전의 티베트가 구질서의 옹호자들이 말하듯이 지상 낙원인 것은 곁코 아니었다. 당시 티베트의 인구는 감소했고 주민들 사이에 기근과 성병이 풍토병처럼 만연했으며 지독하게 가난하고 황량한 나라였다. 티베트의 지배자들은 농노에 대한 생사 여탈권을 가진 특히 잔학한 봉건 지배계급이었다. 일단의 사회주의자들이 이 점을 이용하여 중국의 점령을 옹호하면서, 자신들이 봉건적 미신과 후진성을 일소했다고 주장했다. 물론 보건과 교육 수준이 개선되기는 했지만, 대다수 티베트인들은 1959년 이전만큼이나 오늘날에도 힘없고 가난한 것이 현실이다. 잔학한 구 지배계급이 또 다른 잔학한(그리고 훨씬 더 잘 무장된) 지배계급으로 대체된 것이다. 중국의 티베트 점령 이래 30년도 더 지난 지금 대다수 티베트인이 차라리 옛 지배계급이 복귀하기를 바란다는 사실보다 중국 점령에 대한 더 큰 저주는 없을 것이다.

 중국 점령에 대한 이러한 증오는 두 가지 주요 요인에 뿌리가 있다. 경제적 재앙과 문화혁명 기간 동안 티벳 문화를 거의 절멸시키다시피 한 것이 그것이다. 경제적 재앙은 중국 기술자들이 농민들에게 전통적인 보리 대신 겨울밀을 심을 것을 강요한 1960년대초에 시작되었다. 여기에 한족의 대규모 티베트 이주 및 그로 인해 증대된 지력 고갈이 한몫을 거들면서 티베트는 엄청난 손실을 입었다. 티벳에 대해 연구한 한 역사가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겨울밀은 티벳의 토양에 적합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은 토종 보리보다 훨씬 더 많이 토양의 필수 영양소를 고갈시켰기 때문이다. 겨울밀은 처음에 꽤 많은 양을 수확한 뒤에 급속히 산출량이 감소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더욱이 급격한 인구 증가와 경부된 사냥과 어로는 티베트 고원의 섬세한 자연 균형을 교란시켜 그것을 수세대 동안 사람이 살 수 없는 지대로 바꾸어 놓았다.

 

 

 그 결과는 몇 년 동안 지속된 기근의 만연이었다. 대약진 운동 직후의 상황이어서, 구호에 쓰일 비축 곡물이 거의 또는 전혀 없었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갔다. 곧이어 문화혁명의 공포가 뒤따랐다.

 티베트 문화의 모든 측면에 대한 체계적인 공격은 1979년 문화혁명이 공식 종료될 때까지도 멈추어지지 않았다. 수천 명이 감옥에서 썩어 갔고, 티베트어와 티베트 문화를 금압하려는 시도가 1970년대 내내 계속되었다. 1981년에 호요방(胡耀邦)이 티베트를 방문한 후에야 비로서 이 정책을 다소나마 완화하겠다는 발표가 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사원 몇 개가 재건되고, 티베트 의상을 입었다고 거리에서 공격받는 일이 더 이상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한족이 독점하는 국가 기구에 의한 체계적인 인종주의가 여전히 계속 되는 한 근본적으로 변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대규모 폭동이 1987년 10월과 1988년 3월에 라사에서 일어났고 이 사이에 소규모 시위가 여러 차례 있었다. 1989년 1월에 발생한 두 가지 사건은 분위기를 결정적으로 뒤바꾸어 놓았다. 그 첫 번째는 공산당 성위원회 서기가 티베트 민족주의에 대해 '유화적인' 대처를 했다는 이유로 해임된 일이다. 두 번째 사건은 티베트의 정치·종교적 서열상 달라이 라마 다음의 제2인자인 판첸 라마의 장례 행렬이 독립을 요구하는 대중 집회로 돌변했으나 별 충돌 없이 경찰에 의해 해산되었다. 그러나 3월 5일(1988년 폭동의 기념일이고 주요한 종교 제전이 열리는 날)이 되자 또 한 차례의 그 같은 시위가 다시 벌어져 수백 명의 도시 청년들이 여기에 가담했고, 시위는 눈에 띄게 전투적인 양상을 보였다. 시위대에 경찰이 발포하여 적어도 10명이 죽고 그 이상이 부상당했다. 그 뒤 이틀 동안, 대부분은 의도적으로 팔레스타인 인티파다(intifada)의 전술과 복장을 모방한 듯한 수많은 도시 청년들이 대규모로 모여서 라사의 티베트 구역을 장악하고는 중국인 가게와 회사들에 방화하고 자기 구역을 바리케이트로 방어하였다. 30년 만에 처음으로 티베트의 독립 투쟁은 국가에 도전하였고 잠시나마 승리했다.

 그러나 티베트인들에게는 불리한 조건들이 너무 많았다. 3월 7일 계엄령이 선포되고 수천 명의 특수 부대가 티베트에 투입되었다. 대량 체포, 구타 그리고 총격전이 뒤따랐고 라싸는 그 해 내내 계엄령 하에 놓이게 되었다.

 중국 내 티베트와 회교도 지역은 중국 지배계급에게 여전히 계속되는 쓰라린 상처로 남아 있다. 두 경우 모두, 1980년대의 제한적 자유와 조치는 억눌린 증오가 공공연하게 표출되게 하는 계기가 되었을 뿐이며, 조직화를 위한 더 큰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소수 민족의 밚란은 러시아의 경우보다는 덜 심했지만, 점점 더 위기로 치닫는 1980년대의 불안정한 상황에 또 하나의 불안 요인을 보탰다. 더군다나 1989년 3월에 라사는 중국 지배계급을 뒤흔드는, 도시가 가진 힘 - 1989년 5월에 중국 전역에서 폭발하게 될 - 을 미리 보여준 축소판이었다. 그것은 또한 지배계급이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어느 정도나 극단적 살육으로 나아갈 수 있는가를 보여주었다.

출처 : 박근형의 티베트 사천 자료실
글쓴이 : berdl28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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