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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르포「티베트에서 탈출한 사람들」

chomice 2008. 1. 2. 15:59

르포「티베트에서 탈출한 사람들」

(ESCAPE FROM TIBET : A Story Behind The Story of A Life-And-Death Trek)

   글쓴이 : 제프리 플라이시먼

   *제프리 플라이시먼은 이 글로 1997년 퓰리처상 특집기사 부문의 최종 수상 후보에 올랐었다.

 원문 출처:「THE PHILADELPHIA INQUIRER」96년 12월 15일


 

 15명의 남녀는 지구상에서 가장 험한 지형의 하나인 히말라야산맥을 가로질러 640km의 길을 걸어가야 했다. 그들은 그 길을 가면서 영하의 기온, 부족한 식량 그리고 무장한 수색대 등 어려운 고비를 넘고 또 넘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이 자유롭게 살기 위해서는 그 길을 갈 수밖에 없었다.

 중국 공산군이 티베트를 무력으로 점령했던 1950년대 이래 중국정부는 티베트에서 20세기에 가장 야만적인 종교적 탄압을 가해 왔다. 티베트 수도인 라사시 광장에는 불교 순례자들이 불공을 드리는 동안 혹시 소란이 벌어질까봐 보안 카메라들이 항시 감시를 계속하고 있다. 한때 7000명의 승려들이 생활했던 드레풍 수도원은 40년 동안 계속 박해를 받아 현재는 승려 수가 500여명으로 줄어들었다. 아직도 남아 있는 승려들에게는 오로지 공산주의 생활방식만이 허용되고 있으며 만약 이를 어기는 자는 "자유롭고 독립된" 티베트에서 신앙을 버리라는 군인들의 요구를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고문과 투옥을 감수해야 한다.

 그 결과 오늘날 티베트에서 자유를 꿈꾸는 사람들의 마지막 희망은 돈을 받고 그들을 네팔로 탈출시켜주는 안내원에게 그들의 운명을 맡기는 것뿐이다. 그들은 네팔로 탈출하여 그들의 정신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가 망명생활을 하고 있는 인도의 다람살라로 가서 안전하게 살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 1996년 10월 14일, 월요일, 오후 1시 27분.

 

 라사 시내에서 트럭 한 대가 차량의 흐름 속으로 끼어들더니 도심을 빠져나기기 시작했다. 29세의 안내원 도르제(Dorje)가 특별히 고용된 운전사 옆에 앉아 있었다. 세 명의 젊은이가 소지품이 든 자루들을 트럭 화물칸에 던져 올린 다음 트럭 위로 뛰어 올랐다. 트럭이 또다시 움직이기 시작하자 몇 사람이 더 트럭에 뛰어올랐다. 그러자 두 명의 여승―롭상(Lobsang; 33살)과 그녀의 가장 친한 친구인 겐둔(Gendhun; 28살)―이, 숨어 있던 하수구에서 뛰어나왔다. 그들은 메고 있던 배낭을 트럭 화물칸에 던졌다. 화물칸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팔을 내밀어 두 여승을 끌어올렸다. 진홍색 모자를 쓴 여승들이 화물칸 속의 사람들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트럭에는 15명이 타고 있었다. 트럭이 얄룽강을 끼고 달리기 시작하자 쓰러져가는 수도원이 밀집해 있고 중국군 깃발이 휘날리는 라사가 점점 희미해졌다.

도로가 험해지기 시작하자 트럭이 심하게 요동해 타르를 칠한 방수포로 차디찬 바람을 막고 있는 남녀들을 뒤흔들었다. 그날 오후 9시 45분 라사에서 남서쪽으로 240km 이상 떨어져 있는 시가체에 도착한 그들 일행은 저녁식사를 준비했다. 저녁식사를 마친 그들은 밤중에 다시 트럭에 올라타고 달리기 시작했는데 새벽 3시 30분에 중국군 검문소로부터 450m 쯤 떨어진 곳에서 정지했다. 화물칸에 타고 있던 모든 사람들이 트럭에서 뛰어내렸다. 도르제는 그들을 이끌고 들판으로 숨어들었다.“우린 검문소를 돌아갈겁니다.”그가 말했다. 그러나 간염을 앓고 있던 롭상이 뒤로 쳐졌다. 그러자 도르제와 29살의 승려 타쉬가 그 여승을 부축하여 얻둠 속으로 사려졌다.

중국군 경비대원들은 자고 있었다. 도르제가 며칠 전 찾아갔던, 얼굴이 쭈글쭈글한 라사의 예언자가 베푼 복이라고 생각했다. 중국군 초소를 안전하게 우회하는 데 성공한 다름 일행은 또다시 트럭에 올라탔다. 그곳에서 약 190km를 달린 후 그들은 셰카르 마을 외곽에 도착하여 트럭에서 내려 토둘에 들어가 숨었다. 중국 경찰을 잔뜩 실은 야전차량이 지나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그곳에서 차를 마시고 손바닥으로 반죽한 보리 냄새나는 "참파"를 먹기도 하며 잠깐 쉬었다. 어떤 사람들은 다 해진 2달러짜리 운동화나 다 떨어진 구두의 끈을 다시 매기도 했다. 모래폭풍이 그들이 숨어 있는 토굴로 불어닥쳤다. 그들이 입고 있는 가죽 점퍼와 운동복들은 영하의 추위를 견뎌내기에는 너무 얇았다.

“몸이 나아지려면 무얼 좀 먹어야 합니다. 우린 어떻게 해서든지 목적지에 도착해야 하니까요.” 겐둔이 롭상에게 말했다.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롭상은 몸집이 작은 겐둔에게 기대선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밤이 되자 그들은 토굴 속에서 기어 나와 14kg이나 나가는 배낭을 짊어지고 산길을 걷기 시작했다.

 겐둔은 나직한 목소리로 롭상을 제촉했다. 그러나 롭상은 계속 뒤로 처지기만 했다. 도르제는 일행을 멈추게 한 다음 롭상에게 말했다.“당신은 몸이 너무 약해요. 이렇게 가다간 산에서 죽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당신은 돌아가야 합니다.”
 두 달 전에도 탈출하려다 간염 때문에 도로 돌아간 적이 있었던 롭상은 땅에 엎드린 채 말했다.“난 갈 수 있어요. 제발 데려가주세요.”
“안돼요. 당신 때문에 다른 사람들까지 모두 위험해질 것입니다.”
“제발.”롭상이 애원했다.
도르제는 땅위에 구부리고 앉아 롭상에게 말했다.“아침이 되거든 저 아래 길까지 가도록 하세요.” 그는 롭상의 귀에 대고 조용히 속삭였다.“한 달 안에 다시 와서 당신을 꼭 구해주겠습니다.”

 일행은 드디어 천천히 걸어가기 시자했다. 겐둔은 비틀거리며 뒤돌아보았다. 몸을 구부린 롭상의 모습이 어둠 속으로 묻히고 있었다.


 겐둔은 6년 전 탈출을 시도한 적이 있었지만 산에서 넘어져 발을 삐었다. 그래서 그는 절뚝거리며 라사까지 다시 되돌아갔는데 중국군에 붙들려 2개월 동안 독방 감옥살이를 해야 했다. 이어 작년 8월에도 탈출을 시도했지만 동료 한 명이 도중에 병에 걸렸기 때문에 또다시 실패했다. 겐둔은 중국 사람들이 티베트사람들에게서 행복을 앗아갔다고 말했다. 겐둔은 그때를 회상하면서 자기는 이제 중국군의 "심문"이 가장 두렵다고 했다.“무슨 일이 있어도 달라이 라마를 욕되게 하는 말을 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겐둔의 말이다.


  ▶ 1996년 10월 16일, 수요일, 아침 7시.

 

 잠파(Jampa : 57살)는 그의 상처난 다리를 비비며 말했다.“내 몸은 괜찮아. 그러나 난 눈이 나빠서 밤에는 볼 수 없어.”그러자 도르제는 24살 된 학생으로“겁없는 사람”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직메(Zigme)에게 험한 지형에서 노승 잠파를 부축해주는 임무를 맡겼다.

 도르제는 해발 5000m나 되는 퉁산을 가리키며 말했다.“저기 저 구름으로 덮인 산꼭대기 보이죠? 우리는 오늘 저기까지 갈겁니다.”일행은 갈지자형으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산꼭대기로 올라갈수록 공기는 점점 희박해졌다. 숨쉬기가 힘들어졌으며 다리는 무거워지고 몸놀림은 둔해졌다. 오후 2시에 일행은 산을 넘었으며 바윗돌이 많은 강바닥을 지나 두 개의 작은 돌담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땅거미가 지자 도르제는 일행을 거기에 남겨두고 혼자서 주위를 정찰하러 나섰다. 자정이 돼서 돌아온 그는 나쁜 소식을 알렸다. 주위에 네 개의 초소가 잇는데 전부 군인들이 삼엄한 경계를 펴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계속 가는 것은 너무 위험하니 다시 돌아가자고 그는 말했다.

 그러자 걀첸(Gyalchen)이라는 여승이 희미한 모닥불빛 속에서 몸을 앞으로 내밀고 라사를 떠나온 이래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라사로 돌아가느니 차라리 죽어버리겠어요.”8남매의 막내로 태어난 걀첸은 여섯 살 때 고향인 농촌을 떠나 수녀원에 들어갔다. 1993년 13살이 되었을 때 걀첸은 11명의 다른 여승들과 함께 바코르 광장에서 항의 시위를 벌였다. 걀첸은 단지“티베트에 자유를”이라고 외친 죄로 끌려가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교도소에서 심문관들은 소를 몰 때 쓰는 막대기에 전기를 통하게 해 전기 고문을 가하면서 걀첸에게 달라이 라마를 욕하라고 요구했다. 그 결과 걀첸의 얼굴은 상처투성이가 되었고 다리를 한 번 얻어맞고 나서 절름발이가 되었다.

 걀첸은 1995년 12월 19일 마침내 석방되었다. 그러나 작년 여름 걀첸은 나무판에 티베트인들의 자유를 위해 기도하는 글을 새겨 전단을 찍어 돌렸다. 그후 한 친구가 일러주었다.
“중국놈들이 네가 전단을 뿌렸다는 것을 알아냈어. 넌 빨리 도망가야해.” 


  ▶ 1996년 10월 17일, 목요일, 오후 5시.

 

 도르제는 일행을 상대로 라사로 되돌아가자고 17시간이나 설득을 했으나 실패했다. 도르제는 마침내 자기 의사를 굽히며 말했다.“해질 무렵에 떠나기로 합시다.”그들은 이제 거의 수직으로 된 산길을 10시간 동안 빠른 걸음으로 올라가야 했다. 험한 산길을 가다가 발에 물집이 생긴다든지 무릎이 아프다든지 발을 삐게 되면 그런 사람들은 대열 맨 앞으로 가 도르제의 손을 붙잡고 기도를 드렸다.

 새벽 4시, 도르제는 일행을 우리로 안내했다. 그들은 우리 안에서 유목민이나 고원에서 소를 치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서로 껴안고 잠시 잠을 청했다. 유목민이나 소치는 사람들이 그들을 보면 37.50달러에 해당하는 상금을 타기 위해 빌고할 수도 있었다. 아침이 되자 도르제는 이제 대낮에 가는 것은 너무 위험하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 안에 앉아서 카드놀이를 했다. 카드 뒷면에는 AK47 기관단총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타쉬(Tashi)가 카드 한 장을 들고 소리쳤다.“중국군을 격퇴하기 위해서 이것이 필요합니다.”


타쉬의 몸은 온통 고문을 받아 생긴 상처투성이였다. 머리도 여기저기 상처로 울퉁불퉁해져 있었다. 수갑과 족쇄 때문에 그의 손목과 발목에는 하얀 동그라미 자국이 나 있었고 등에는 색이 바랜 채찍 자국이 줄무늬처럼 남아 있었다. 젊은 승려인 타쉬는 지금은 중국군에 의해 폐허가 되었지만 왕년에는 화려하기 그지 없던 수도원들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때 느낀 분노를 그는 1988년 시위에 참가했을 때 풀었다. 시위에서 그는 중국군 군용차 한 대를 뒤짚어엎고 도끼로 박살을 냈던 것이다. 그는 체포되어 3년 징역형을 받았는데 5명의 다른 승려들과 더불어 티베트 역사에 관한 전단을 작성한 것이 발각되자 추가로 9년 징역형을 더 받았다. 그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나는 수갑을 하도 오래 차고 있었기 때문에 놈들이 수갑을 풀어준 후에도 오른팔을 올리면 왼팔이 따라 올라갔습니다. 우리는 단지 조국을 되찾고 싶었을 뿐입니다.”

제일 힘든 것은 밤중에 걷는 일이었다. 그러나 도르제는 새벽이 되기 전에 네 개의 검문소를 지나야 한다고 말했다. 그들은 이미 10시간 동안 걸었으며 두 개의 다리를 건넜다. 그런데 그들이 강둑에 도착했을 때 세번째 다리가 없어진 것을 알았다. 도르제는 크게 당황했다. 그는 강을 따라 아래위로 뛰어다녀 보았지만 건널 만한 곳을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일행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넓은 비닐 조각을 펴서 몸을 덮고 잠을 청했다.

노승 잠파는 대나무로 된 배낭에서 옛날 불교 법전을 꺼내며 말했다.“이게 중국놈들의 손에 닿으면 더렵혀질거야. 그래서 미리 꺼내놔야겠어.”


잠파는 일행 중에서 자유로웠던 조국 티베트를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는 중국의 문화혁명 때 붙들려 교도소에서 심하게 구타를 당했다. 그는 그때를 회상하며 말했다.“지금 모든 상황이 그때와 똑같아. 다만 내가 늙은 것이 다를 뿐이지.”그는 티베트에 와 있는 중국인들은“승려를 가장 악질이라 생각하며 도둑보다 더 가혹하게 취급한다.”고 덧붙었다.

 

  ▶ 10월 19일, 토요일, 새벽 6시 30분.

 

이날 아침 도르제는 강을 건널 수 있는 곳을 발견했다. 일행은 신을 벗고 바짓가랑이를 걷어 올렸다. 그들이 강물로 들어가 밑바닥에 자갈과 돌들이 깔린 45m 넓이의 강을 조심조심 건너가기 시작했을 때 흐르는 물 속에서 부빙들이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그들은 어둠이 깔릴 때까지 계속 걷다가 또다른 양우리에서 잠을 잤다. 그후 이틀 동안 그들은 새벽에 일어나 해질녁까지 걸었다. 그날 밤 11시에 일행은 해발 5490m 빙하로 덮여 있고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는 산고개인 낭파패스 아래 지점에 도착했다.“다음 3일이 아마 여러분의 일생에서 가장 어려운 시기가 될 것입니다. 게다가 먹을 것도 거의 다 떨어졌는데 우리는 계속 걸어가야 하기 때문입니다.”도르제가 말했다.

 

  ▶ 10월 22일, 화요일, 밤 12시 30분.

 

먼동이 트기 전에 그들은 중국군이 잠들어 있는 네 개의 하얀 천막을 몰래 지나가야 했다. 그것은 네팔 국경을 넘기 전에 있는 마지막 중국군 검문소였다. 정강이까지 빠질 정도로 쌓인 눈이 다 떨어진 신 구멍을 통해 마치 체질을 할 때 밀가루가 빠지듯이 산발 속으로 스며들었다. 어떤 사람은 흘린 눈물이 눈 언저리에 얼어붙어 있었으며 또 어떤 사람들은 몸 전체가 마비되어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마침내 일행은 산꼭대기에 다다랐으며 티베트를 탈출한 사람들을 발견하면 상금을 타기 위해 그들을 상부에 끌고 가는 일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윽고 기둥 주위에 돌을이 잔뜩 쌓인 곳이 나타나자 도르제와 타쉬는 그곳에 하얀 스카프를 하나 메놓았다. 거기에는 티베트를 탈출한 수많은 사람들이 조국에 대한 마지막 인사로 매어놓은 하얀 스카프들이 많이 나부끼고 있었다.“자유 티베트 만세 !” 몇 사람이 소리치자 그 소리는 우렁차게 히말라야 산맥 속으로 울려 퍼졌다.

 

  ▶ 10월 23일, 수요일, 오후 1시 30분.

 

일행은 낭파패스의 네팔쪽 비탈길을 5시간 동안 비틀거리며 내려간 후 잠시 쉬었다. 가왕(Ngawang ; 36살)이 먹을 물을 찾으러 나섰다. 그의 발에 생긴 두터운 물집들이 터져 있었다. 설맹에 시달린 그의 눈은 권투선수처럼 부풀어올랐고 동상에 걸린 코는 허물이 벗겨져 있었다. 가왕이 깡통으로 웅덩이의 얼음을 깨고 먹을 물을 채우고 있는데 올이 굵은 삼베로 된 자루 하나가 바위틈에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그것을 풀어보았다. 자루 속에는 썩은 야채와 같은 색깔의 사람 다리 한 쪽이 들어 있었다. 가왕은 자루를 끈으로 천천히 다시 매고 울었다.‘나 같은 사람이었구나. 큰 희망과 꿈을 안고 떠났다가 이곳에서 자유도 찾지 못한 채 죽다니!’그는 생각했다.

 가왕은 일행들이 있는 곳에 다시 돌아와 그 자루에 대해 얘기했다. 그러자 도르제는 언짢은 목소리로 일행에게 일찍이 12명을 이끌고 그 산까지 왔던 안내원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들이 그곳에 도착하자 심한 눈보라가 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중 여섯 명은 눈보라 속에서 죽고 나머지 여섯 명은 가까스로 산에서 내려왔다. 그렇지만 살아남은 사람들도 모두 동상에 걸려 손과 다리를 잃었다. 죽은 사람들은 모두 20대의 남자로 이듬해 봄 유목민들이 보고 돌로 덮어주도록 산길에 그대로 남겨두고 왔다. 도르제는 하던 이야기를 마치고 일행들에게 이렇게 경고했다.“여러분이 만약 계속 걸어가지 못하면 그들과 같은 운명을 맞게 될 것입니다.”

 일행은 마침내 산 밑에 도착했는데 거기에는 둥근 커다란 돌들이 수없이 많았다. 그들은 거기서 흩어져서 큰 돌들을 한번에 하나씩 넘어가기 시작했다. 여러 시간 동안 큰 돌들을 넘으면서 그들은 넘어져 무릎이 깨지기도 하고 손이까져 피가 나기도 했다. 마침내 노승잠파가 다른 사람들을 따라가기에는 너무 지쳤기 때문에 그들은 야영 준비를 했다. 간밤에는 사방에 바윗돌만 보이던 것이 이튿날 아침 일어나 보니 푸른 산림과 잘 가꾸어진 갈색 목초지와 벼를 심은 논들이 펼쳐져 있었다. 마치 네팔 전체에 하나의 푸른 융단이 깔려 있는 것처럼 보였다. 따뜻한 햇빛을 쬐기 시작하자 동상에 걸린 부분이 녹기 시작했다.

 저녁이 되자 그들 뒤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네팔 경찰관 세 명이 곤봉을 휘두르며 약 30분 동안 그들의 뒤를 쫓고 있었던 것이다.

 도르제는 갑자기 산등성이 아래로 허겁지겁 뒤어내려가기 시작했다. 뒤이어 다른 사람들도 같이 뛰어내려가기 시작했다. 뒤이어 다른 사람들도 같이 뛰어내려 숲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 숨었다. 그들을 내려다보던 네팔 경찰관들은 무슨 까닭인지 그냥 가버렸다.

 도르제는 일행을 이끌고 13km를 더 걸어 한 수도원에 도착했다. 그곳에 잠파를 남겨두면 안전할 것 같았다. 잠파가 좀더 건강해지면 나중에 그들과 합류할 수 있을 것이다. 잠파가 그곳에 남게 되자 직메가 항의했다.
“우린 스님을 여기 남겨두고 갈 수 없어요.”
“난 더이상 갈 힘이 없네. 그러니 자네들만이라서 가서 자유를 찾도록 하게. 난 나중에 따라가도록 하지.”노승이 말했다. 직메는 노승을 두 팔로 꼭 껴안았다. 새벽이 되자 일행은 다시 길을 떠났다.

 

  ▶ 10월 27일, 일요일, 오후 4시 57분.

 

떠난지 14일째 되던 날, 도르제는 구름이 발 아래 보이는 높은 산을 내려가 마침내 차일사 피난민 수용소에 도착했다. 수용소에는 기도 깃발들이 휘날리고 있었다. 마침내 자유를 찾은 것이었다.

 그곳까지 같이 온 13명은 모두 풀밭 위에 푹 쓰러지고 말았다. 피난민 수용소를 운영하고 있는 티베트 사람들은 그들이 인도에 있는 달라이 라마 곁으로 무사히 갈 수 있을 때까지 돌봐주겠다고 약속했다.

 

  ▶ 10월 29일, 화요일, 새벽 5시 30분.

 

새벽 일찍 산꼭대기에 엷은 안개가 낀 가운데 도르제는 일행이 잠든 사이에 수용소를 떠났다. 그는 혼자 낭파패스 쪽으로 되돌아가서 다시 몰래 티베트로 들어갈 생각이었다. 캄캄한 어둠 속에 남겨두고 온 여승 롭상을 찾아 꼭 데리러 오겠다고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는 자기에게 다시 한번 부처님의 가호가 있기를 기원했다.

출처 : 박근형의 티베트 사천 자료실
글쓴이 : berdl28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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