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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달라이 라마 자서전「티벳, 나의 조국이여 (My Land and My People)」[2]

chomice 2008. 1. 2. 15:58
6. 중공에서

중국인 관리가 티벳 마을을 방문했을 때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마을 사람들은 그가 도착하면 그를 환영하기 위해 모두 모여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열렬한 박수로 그를 맞이했다. 그는 꽤 만족해하면서 그들 중 한 사람에게 새 정권 하에서의 생활을 물어봤다. 그 사람은 말했다.
“예, 매우 행복합니다.”
“아주 좋습니다.”
“이 새로운 세금을 제외하곤요.”
“새로운 세금이라뇨?”
“네, 박수치는 세금 말입니다. 중국인이 여기에 올 때마다 우리는 모두 모여서 박수를 쳐야 하거든요.”
티벳인들이 내는 대부분의 세금이 항상 다소 내키지 않는 노동으로 지불되어왔다는 것을 기억할 때 그 이야기는 진실을 넘어선 것임에 틀림없었다. (81)

그는(모택동) 진정한 민주주의 형태에 대하여 긴 강의를 시작했다. 그리고 나에게 국민의 지도자가 되는 방법과 그들의 제안에 어떻게 귀를 기울여야 하는가를 충고해주었다. 그리고 나서 의자를 바짝 당겨 앉더니 귓속말로 속삭였다.
“나는 당신을 잘 이해하오. 그러나 종교는 독약이오. 그것은 두 가지 결점이 있소. 하나는 민족을 침식하는 거고 다른 하나는 국가의 발전을 방해하는 거지요. 티벳과 몽고는 둘 다 그 해독을 입어왔소.”
나는 정말 놀랐다. 그가 암시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진정하려고 노력했다. 그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 나는 그가 틀림없이 종교를 철천지원수처럼 여기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는 진심으로 우호적이었고 나에게 애정을 품은 것처럼 보였다. 그는 이런 놀라운 비평을 하고 난 뒤, 차타는 데까지 나와서 배웅했다. 그의 작별인사는 단지 건강을 돌보라는 것뿐이었다. (84)

나는 모택동의 뛰어난 인품에 큰 감명을 받았다...... 옷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듯 했다. 한번은 옷의 소맷부리가 터져 있는 것을 보았다. 그의 신발은 한번도 닦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는 행동이 느렸으며 연설할 때는 더욱 느렸다. 그는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았으며, 짧은 문장으로 말했고, 한마디 한마디가 의미 깊고 명확하고 정확했다...... 그의 연설방식은 분명히 청중의 마음과 상상력을 사로잡았으며 친절하고 성실하다는 인생을 심어주었다. 그리고 그가 스스로 말한 것을 믿고 있으며, 그가 계획했던 목표는 무엇이든 성취한다는 자신을 가지고 있다고 확신했다. 나는 또한 그가 폭력으로 티벳을 공산화하지 않으리라 믿었다. 확실히 나는 그 후 티벳에서 중국 당국이 실시한 박해정치에 환멸을 느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이런 압제가 모택동의 지지와 승인을 얻었다고 믿기는 어렵다는 것을 안다. 중국 정계에서 또 다른 중요한 인물은 주은래 수상이다. 나는 그에게서 전혀 다른 감명을 받았다......나는 항상 주은래가 우호적임을 알았으나 모택동만큼 솔직하고 개방적이지는 않았다. 그는 극도로 공손하고 정중하며 온화하고 자기 자신을 완벽하게 자제하는 것 같았다......처음 그를 만났을 때, 나는 그가 매우 영리하고 빈틈없다는 것을 눈치 챘다. 또한 그가 마음에 먹은 계획을 수행하는 데 무자비하리라는 인상을 받았다. 나는 뒤에 그가 티벳의 압제 정책을 승인했다는 것을 듣고서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 만약 모택동이 그랬다면 놀라운 일이지만. (84~85)

누구도 공산주의 아래서 중국이 해낸 거대한 산업 발전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능률과 발전의 공적은 그들이 받는 댓가와 균형을 유지해야만 하며, 내가 보기로는 중국에서의 발전은 모든 국민들의 개성을 희생시킨 댓가였기 때문에 무서운 것이었다.
그들은 단순하며 획일적인 인간성을 가진 집단으로 되어가고 있었다. 나는 내가 갔던 어느 곳에서든지 엄격하게 조직되고 훈련되고 통제된 그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남녀를 불문하고 모두 같은 칙칙한 노동복을 입었을 뿐만 아니라 모두 같은 말과 행동을 했다.
그래서 나는 모든 생각도 같으리라 믿는다. 그들은 다른 것을 생각할 수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단지 하나의 정보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즉 신문들과 라디오 방송은 단지 정부의 의견만을 내보냈기 때문이다. (89)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웃는 습관까지도 잃어버린 것 같았다. 그들은 단지 웃어야 된다고 생각할 때만 웃는 것처럼 보였으며 노래를 부르라고 할 때만 노래하는 것 같았다. 확실히 젊은 공산주의자들의 몇몇은 그들 나름대로 영리하고 좋은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독창적인 견해를 표현하지 않았다. 한결같이 중국의 위대함과 빛나는 업적에 대한 이야기뿐이었다......능률과 물질적 진보, 재미없는 획일의 회색빛 분위기 이런 것들을 통해서 볼 때 옛 중국의 전통적인 매력과 예의는 이따금 놀라움과 호의 속에서 섬광처럼 빛나는 점이었다. 그 같은 획일성은 물론 공산주의의 무서운 힘이다. 이것은 거의 1년 가까이 중국에 있으면서 나에게 남은 전체적인 인상이다.
그러나 나는 중국인이 티벳인을 그런 정신의 노예 상태로 몰아넣는 데 성공할 수 있으리라고는 결코 믿지 않는다. 종교, 유머, 그리고 개성은 티벳인에게 있어 생명의 호흡이다. 그리고 어떠한 티벳인도 결코 이러한 가치들을 단순한 물질적인 진보와 바꾸지는 않을 것이다. 비록 그런 전환이 외세에의 예속과 무관하게 이루어진다고 해도 말이다. (90)


7. 압제와 분노

내가 태어난 마을인 타크처를 다시 방문할 기회를 가지게 된 것은 귀국길에서였다. 그것은 불길한 예감으로 가득 찼던 여행 중에 가진 행복한 순간이었다......나는 그들에게 그들이 행복한지 어떤지 물었다. 그들은 “중국 공산당과 주석 모택동의 지도 하에 매우 행복하게 잘 살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 말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들의 눈에서 눈물방울을 보았다. 나는 나에게조차 그들이 두려운 눈으로 이런 공산주의 방식으로만 답변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심한 충격을 받았다. (92)

......중국 본토에서 관찰했던 두 가지 일을 생각나게 했는데 하나는 매우 슬픈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한 줄기 남아있는 희망의 빛을 보이게 하는 것이었다.
첫째의 것은 중국 사원에 관한 것이었다. 중국의 외진 모든 곳에서 나는 역사가 오래된 중요한 사원과 수도원들이 거의 비고 방치된 채로 남아 있는 것을 보았다. 남아 있는 소수의 승려들은 늙었고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기도하거나 시주하기 위해 사원에 오는 그런 상황 속에 살고 있었다. 나는 내몽고에 박식한 라마들이 여전히 있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중국의 사원과 수도원에서 학덕을 갖춘 승려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나는 티벳인들이 노소를 막론하고 그들의 성품과 신앙이 굳어서 중국의 사상 주입에 쉽사리 제물이 될 수 없다는 빛나는 증거를 보았다......티벳 어린이들은 단순히 유물론적 이념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던 것만이 아니라 그들 모두의 심층 의식 속에는 티벳인으로, 불교인으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95)

중국인들에 대한 일반 국민들의 원한은 티벳에서 전혀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내게 되었다. 정치적 지도자들이 자연스럽게 백성들에 의해 선출되었다. 이들은 정부 관리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전혀 관료적 지위를 갖지 못했고 모두 평민 계급 출신이었다. 그래서 내가 그들을 정치적 지도자로 묘사할 때 서구적 의미에서 정치적 지도자임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중국인들이 공산주의자였기 때문에 기들에게 대항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세계를 나누는 정치적 이론과는 무관했다. 단지 그들은 자기의 의사를 분명히 밝히지 못하는 사람들의 불행과 분노를 함께 나누고 그들의 뜻을 말과 행동으로 나타내는 데 타고난 능력을 가졌던 소박한 사람들일 뿐이었다......내각은 나와 마찬가지로 중국을 공격하려는 그들의 증오심을 알고 있었다. 내각은, 애국적이긴 하지만 자살적인 정책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해야만 했다. 반면에 그들은 자연히 내각이 지나치게 침입자들의 비위나 맞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때때로 나는 티벳 국민들을 대표하는 바로 그 사람들을 위해 그들이 격렬한 충동에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 개입해야 했다. 그들은 그것에 분개하였을 것이지만 최후까지 나에게 충성스러웠다. 나는 나 자신의 개인적인 인격 때문에 이런 충성을 얻었다고 자만하지는 않는다. 충성을 받은 것은, 모든 티벳인이 마찬가지이지만, 나 자신이기 보다 달라이라마 자체였다. 그들이 충성을 지키는 것은 달라이라마에 대한 관념이었다. 달라이라마는 그들이 싸우고 있는 모든 것의 상징이었다.
내 입장에서는, 비록 내가 그들을 반대해야 했을 때조차도 그들을 존경했다. 나는 우리의 불행 속에서조차 티벳인들 사이에 존재해 있는 지도자에 대한 그런 성향을 티벳인들이 보여주었다는 것이 기뻤다. 그것은 우리가 언제나 필요로 하는 그런 것이었다. (98~99)

지금까지 우리 문제의 평화적인 해결을 위한 모든 나의 시도들은 무산되었고 단순히 정부의 흉내에 지나지 않는 준비위원회에서 나는 장래의 어떤 더 나는 희망도 볼 수 없었다.
가장 어려운 것은 내가 국민들을 통제할 수 있는 힘을 잃고 있음을 느낀 것이었다. 동부 쪽에서 그들은 만행으로 치닫고 있었다. 중앙 티벳에서 그들은 폭력에 호소하는 결의를 더욱 굳혀 갔다. 나는 폭력을 승인할 수 없었고 또 폭력이 우리를 도울 수는 없다고 믿었지만, 그들을 더 이상 멈추게 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티벳이 여러 세기 동안 행복하게 지켜 온 달라이라마로서의 나의 이원적인 지위는 거의 지탱할 수 없게 되어갔다. 종교적이자 세속적인 두 가지 직분의 지도자로서 나는 국민들에 의한 어떤 폭력도 반대해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
나는 중국인들이 나의 정치적 권한을 매장시키려고 시도하는 것을 알았다. 내가 국민들의 폭력을 반대하는 한 국민들의 나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려 결국은 중국을 돕는 일이 된다. 그러나 국민들이 세속적인 지도자로서의 나에 대한 신뢰를 잃는다 할지라도 종교적 지도자로서의 나에 대한 신뢰는 잃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보다 중요한 일이다. 나는 나의 세속적 지도권을 포기하거나 대표할 수 있다. 그러나 종교적인 지도자로서의 달라이라마의 권한은 결코 포기될 수 없었고 나도 또한 그렇게 되는 것을 꿈에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래서 나의 종교적 권한을 있는 그대로 두기 위하여 내가 모든 정치적 활동을 그만둔다면 티벳에 최상의 이익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내가 티벳에 있을 동안은 정치로부터 도피할 수 없었다. 정치를 그만두기 위하여 나는 비록 내키지는 않았지만 비통하고도 자포자기한 마음으로 나라를 떠나야만 했다. 그와 같은 깊은 절망의 순간에 나는 인도를 방문해달라는 초청장을 받았다. (101~102)


8. 인도 순례

내가 뉴델리에서 첫날 아침에 맨 먼저 찾은 곳은 마하트마 간디의 화장터인 라지가트였다. 나는 자무나 강 아래로 경사진 녹색 잔디에서 기도할 때 매우 깊은 감동을 받았다. 나는 한 고귀한 영혼 앞에 섰음을 느꼈다. 그는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영혼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인도와 인류의 정신을 지키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야말로 부처님의 참다운 제자요, 인류의 평화와 화합을 신봉했던 사람이었다. 나는 거기에 서서 만일 마하트마가 살아 있다면, 나에게 어떤 현명한 조언을 해주었을 것인가를 곰곰이 생각하였다. 나는 확실히 그가 티벳사람들의 자유를 위한 평화적인 운동에 그의 전력을 다해 주었을 것이라고 느꼈다.
나는 이 세상에서 그를 만날 수 있는 영광을 가질 수 있기를 열망하였었다. 그러나 거기에 서 있으면서 그에게 더욱 가까이 와 있음을 느꼈고, 나는 항상 평화의 길을 따라야 한다는 그의 조언을 받았다는 느낌을 가졌다. 그가 주장하고 실천하였던 비폭력의 가르침에 흔들리지 않는 신념을 갖고 있었으며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지금 내게 부딪치는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그의 조언을 따르기로 더욱 굳게 결심하였다. 나는 어느 때보다도 강하게 나 자신을 폭력과 연관시키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109~110)

그것은 나에게 세계의 평화를 위하여 아무런 억압 없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일에 헌신하고 있는 각국의 현명한 사람들과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국가들 사이의 평화란, 내가 마음속에로 생각하는 최우선의 사상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모임에서 연설할 때 불교 신앙의 평화적인 성격을 강조하였다. 나는 이러한 행사들이 아시아에서 뿐만 아니라 서양 사람들에게도 깨달음의 길을 전해주는 데 도움이 되기를 희망한다고 말하였다. 왜냐하면 부처님의 가르침은 개인의 평화롭고 만족스러운 삶뿐만 아니라 국가들 사이의 적대감도 종식시킬 수 있기 때문이며, 나아가 인간성 회복의 길도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도 그 생각에 변함이 없다고 자신 있게 덧붙여 말할 수 있다. 인간성의 회복은 그들의 신앙이 무엇이든지간에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종교적인 본능에 있다. 평화의 적은 이 본능을 강제적으로 억압하는 것이다. (110)

만일 우리가 중국에 대항하였다면 그들은 아주 쉽게 우리를 완전히 멸망시킬 수 있는 더 큰 무력을 투입시켰을 것이다. (111)

나는 난갈의 거대한 수력발전 계획과 같은 여러 가지 새로운 산업단지들을 시찰하였으며, 비로소 이러한 일들이 공산주의 치하에서 실행되는 것과 자본주의 치하에서 실행되는 데에는 그 방법에 커다란 차이가 있음을 스스로 알게 되었다. 즉, 강제 동원된 노동과 자발적인 노동 사이에는 전적으로 다른 분위기와 정신 자세가 있음을 알았다. (113)

나는 종파심과 집단적 증오가 지난날 어떻게 이들 유산을 손상시켰으며, 인도 헌법의 종교 자유 보장으로 어떻게 증오가 평온과 평화로 변하게 되었는가를 생각해 보았다.
나는 베나레스와 부다가야에서 나를 만나기를 기다리는 수천 명의 티벳인 순례자들을 만났다. 나는 이 두 성지에서 순례자들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설법하였으며, 그들은 언제나 부처님이 우리들을 위해 명백하게 가르쳐주신 평화의 길을 따라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부다가야 방문은 내게는 깊은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모든 신심이 깊은 불교도들은 그들의 종교적, 문화적 유산 중 가장 고귀하고 존귀한 모든 것들을 항상 부다가야와 함께 연상할 것이다. 나는 유년시절부터 부다가야 참배를 생각하고 꿈꾸어 왔었다. 나는 이 신성한 장소에서 최고의 열반을 이루시고 인류 구제의 길을 발견하신 성스럽고 위대한 영혼 앞에 서 있었다. 내가 거기에 서 있었을 때, 나의 마음은 종교적이 열정으로 가득 찼고 우리들 모두에 잠재되어 있는 신성한 불성의 힘과 자비로 나의 마음은 어쩔 줄 모르게 되었다......그래서 며칠 후에 나는 다시 불신과 증오의 정치세계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113)

나는 정치에 신물이 났다. 정치적인 이야기가 델리에서의 내 시간의 대부분을 차지하였으며 나의 순례 여행을 단축시켰다. 나는 그것들을 몹시 싫어하기 시작하였으며 만일 내가 티벳에서 나의 국민들에 대한 의무감만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기꺼이 전적으로 정치에서 물러났을 것이다. 칼림퐁과 강토크에서 나는 명상을 위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고, 나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모인 그곳 사람들에게 종교적인 설법을 할 수 있었으므로 행복하였다. (116)


9. 폭동

......친랴오렌 장군이었다. 그는 내가 진심으로 아주 좋아하는 중국 장교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성실하고 정직한 사람이었다. 사실 나는 그뿐만 아니라 그처럼 정직하고 동정적인 여러 다른 사람들을 만난 적이 있다. 나는 그들 중의 많은 사람들이 기꺼이 우리를 도와주려는 것을 잘 안다. 그러나 그들은 엄격한 공산주의 원칙을 따라야만 되므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그러나 그들 중 한 사람은 그러한 의식이 아주 강해서 1958년에 우리 게릴라 병력에 가담하여 9개월간 함께 싸웠다. 그는 지금 인도에 망명해 있다. (121)

중국 군인들은 게릴라들을 색출했을 뿐만 아니라, 정당하게든 부당하게든 그들을 도왔다고 의심이 가는 사람들이 사는 사원과 마을에 대포와 전폭기를 사용하였다. 그래서 마을과 사원들은 모두 파괴되었다. 라마들과 마을 지도자들은 모욕당하고, 투옥되었으며, 고문당하고, 사형 당하기까지 하였다. 토지 또한 몰수당하였다. 우리에게 소중한 불상들, 경전들, 그리고 선물들은 깨지고 우롱 당하였으며 도난당하였다. 종교는 단지 사람들을 착취하는 수단일 뿐이며 더욱이 부처님은 <반동주의자>라는 불경스런 성명서가 포스터와 신문으로 제작되었고 그 내용을 학생들에게 선전하였다. 중국 지역에서 출판된 이런 내용을 담은 신문 복사판 몇 장이 라사에 도착되어 티벳 관리들과 중국 관리들에게 배부되었다. 중국 당국은 티벳인들의 강한 반발을 알았고 그들이 너무 심했음을 깨달아 라사의 시민들이 그 소식을 듣기 적에 신문을 회수하기 위해 신문 1장당 5달러의 댓가를 지불하였다. (124)

나는 게릴라들을 대단히 칭송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우리의 종교와 조국을 구하기 위하여 그들과 그들의 아들딸들의 목숨을 걸고 싸우는 용감한 국민들이었다. 동부에서 중국인들이 행한 만행을 들었을 때 복수심을 일으키는 것은 인간의 자연스런 반응이었다. 더구나 그들은 달라이 라마인 나 자신에 대한 충성심에서 싸우고 있다고 스스로 믿고 있음을 나는 알고 있었다. 달라이 라마는 그들이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의 핵심이었다.
나는 종종 나의 라지가트 방문을 돌이켜 생각하고 이렇게 변화하고 있는 상황에서 마하트마 간디는 나에게 어떤 충고를 줄 것인지를 생각해보곤 하였다. 그는 여전히 비폭력을 충고할까? 나는 그가 그러리라고 밖에 믿을 수 없다. 우리에게 제아무리 심한 폭력이 자행된다 하더라도 폭력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실질적인 면에서 우리가 만약 그들과 싸운다면 중국인들이 티벳 전역에서 손쉽게 무슨 짓을 할는지는 동부지역의 잔학한 예로 보아 알 수 있었다.
나는 나의 국민들이 무력을 사용하지 말 것과 동부에서와 같은, 아니면 더 처참할지도 모르는 보복을 유발시키지 말도록 설득해야만 한다고 생각하였다. (125)

그들(중국)의 반복된 약속들은 나에게 최후의 희망을 주었는데 그것은 아마도 그들이 의도했던 바였을 것이다. 그리고는 그들은 갑자기 그들의 정책을 변경시켰다. 지금까지 동부지역에서 게릴라들에게 보복을 가했고...... 그들(중국)은 이제 우리 정부가 그들(게릴라)에 대하여 행동을 취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우리는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 티벳 군대를 보내야만 했다......무엇보다도 내각(티벳)은 티벳 군대가 쉽사리 게릴라들과 합류하지 않는다는 보장을 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나는 그런 일이 일어날 것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티벳을 지키는 일 외에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은 티벳인들과 싸우기 위해 티벳 군대를 보낸다는 것은 생각할 수조차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마침내 내각은 중국의 명령에 확고한 자세로 도전하게 되었다. (126)
출처 : 박근형의 티베트 사천 자료실
글쓴이 : berdl28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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