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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 티벳 나의 조국이여 (My Land and My People) 」

chomice 2008. 1. 2. 15:58

「 티벳 나의 조국이여 (My Land and My People) 」
정신세계사, 1988년.
김철, 강건기 옮김.



달라이 라마 자서전「티벳, 나의 조국이여 (My Land and My People)」[1]  


1. 농부의 아들

나는 1935년 5월 5일, 티벳력(음력)으로 을해(乙亥)년에 티벳의 북동쪽에 있는 타크처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9)

쇠고기를 먹는 것에 대해서는 불교인들 사이에 견해의 차이가 있지만 대부분의 티벳인에게는 필수적인 것이다. 티벳의 대부분의 지역은 매우 추워서 비록 음식이 풍부하다 할지라도 종류가 매우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쇠고리를 먹지 않고서는 건강을 유지하기 어렵다. 그래서 그 관습은 불교가 티벳에 전파되기 전부터 있었다. 티벳인들은 어떤 동물이든지 어떤 이유에서도 죽이는 것은 죄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죽은 동물의 고기를 팔고 사는 것은 죄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반면에 도살자들은 죄인이나 부랑자로 다루어졌다. (10)

나는 평범한 농가 출신이라는 것을 항상 기쁘게 여겨왔다. 나는 아주 어린 시절에 우리 마을을 떠났는데, 수년 뒤 중국에서 돌아오는 길에 타크처를 방문하여 나의 선조들의 마을과 나의 집을 보았을 때에는 자랑스런 감정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항상 내가 만일 부자나 귀족 가문에 태어났었더라면 티벳 서민층의 감수성과 느낌을 음미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러나 나의 낮은 태생 덕으로 나는 그들을 이해하고 마음을 읽을 수 있었으며, 바로 그것이 내가 그토록 강하게 그들을 느끼고 그들 삶의 운명을 개선하기 위하여 최선을 기울였던  이유이다. (12) *45쪽 참조

화신이 된 어린아이들은 전생의 사람과 사물들을 기억하는 것이 상례이다. 몇몇 어린이들은 전혀 배운 적이 없는 경전을 암송하기도 한다. 내가 고성에게 말한 모든 것들은 그에게 그가 찾고 있던 화신을 마침내 발견했다는 암시를 주었다. (16)


2. 깨달음을 향한 추구

학생들에게 지식을 제공하는 것 이외에도 티벳 교육제도는 학생의 정신능력을 개발시키기 위한 다양한 방법을 가지고 있다. 첫째로, 어린이들은 그들의 교소를 모방하여 읽기와 쓰기를 먼저 배운다. 물론 이것은 사람이 자신의 전 생애 동안 사용하는 자연스런 방법이다. 두 번째의 방법으로는 기억력을 단련하기 위해서 경전을 암송하는 엄격한 과정이 있다. 세 번째 방법인 설명은 전 세계에서 사용되는 것이며, 몇몇 우리 수도원대학에서는 그들의 학생을 가르치는 데 이 방법에 의존하고 있다. 하지만 많은 사원에서는 학생과 교사 사이에 혹은 학생들 자체 내에서 논리적인 토의방식을 택하고 있다. 끝으로, 명상과 정신집중 방법이 있다. 이것은 특히 종교적으로 더 높은 수준의 공부와 실천을 위한, 마음을 단련하는 데 사용된다. (27)

티벳 자체(字體)에는 네 가지 다른 형태가 있다. 처음 2년 동안 나는 하급 후견인들과 상급 후견인들에게 인쇄에 사용되는 자체를 읽는 법을 배웠다. 이 자체는 우-츠엔이라고 한다. 동시에 나는 경전에서 발췌한 경구를 매일매일 암송하였고, 남은 시간에는 경전을 읽으며 보냈다. 그 후, 여덟 살 때는 티벳에서 통상적으로 쓰이는 형태인 우-메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27)

약 8개월 동안 나는 글자 자체의 정식 형태를 습득하기 위하여 나무판에 썼다...... 티벳 글자를 쓰는 데 통틀어 5년이 걸렸다.(28)

나는 열세 살이 조금 지나고 나서부터 형이상학과 철학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이것들은 나의 용기를 잃게 하였고 마치 돌로 머리를 맞은 것처럼 멍한 느낌을 갖게 했었다는 것을 고백하고 싶다. 하지만 그런 기분은 며칠 후 사라지고 초기의 과정과 같이 새로운 학문들이 점점 단순명료해지기 시작하였다. ‘일단 익숙해지면 어떤 것도 어려움은 없다’고 인도 선지자가 말했는데 나는 확실히 이 말이 내 교육에 있어 그렇다는 것을 알았다. 하나하나씩 다른 과목들이 나의 교과과정에 추가되었고 계속 공부함에 따라 이러한 것들은 점점 덜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29)

나는 나의 수행의 각 단계에서 더 높은 교리를 위한 준비로 마음과 몸의 정화를 체험하였다. 나는 여덟 살 때 이러한 체험을 처음 하였으며 아직도 그것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것은 나에게 행복과 평화감을 주었다. 그 뒤의 각 의식 때마다 나는 그것들과 관련된 영적인 체험을 느낄 수 있었다. 내 종교에 대한 나의 믿음과 신앙이 더 깊어갈수록 올바른 길을 따르려는 내 마음의 확신은 더 확고해졌다. 내가 더욱 이러한 체험에 익숙해지고 열다섯 살이 가까워짐에 따라, 나는 부처님에 대한 감사가 마음속에 자라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으며, 티벳인들에게 그들의 보배로운 종교적 교리를 전수해 준 대부분의 인도 교사들과 그것을 우리의 언어로 해석하고 보존해온 티벳 학자들에게 매우 큰 감사를 느꼈다. (29)

나는 사람이 정신적인 완성의 가장 높은 경지에 도달하려면 끊임없이 계속 배워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내 생각으로는, 이 같은 종교적 수련은 어떤 독특한 마음의 평정을 가져다준다. 실제적인 시험은 슬픔이나 고통이 일어날 경우에 온다. 학문과 종교적으로 단련된 마음의 소지자는 이러한 상황을 인내와 참을성으로 대할 수 있다. 종교적 길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그가 재난으로 여기는 것과 마주쳐 그 충격으로 무너지기 쉬우며, 그리하여 끝내는 자기 좌절에 빠지거나 나아가 남에게 불행을 미치게까지에 이른다. 인도주의와 생명에 대한 진정한 사랑은 오직 종교적 가르침에 대한 인식에서 생길 수 있다. 종교의 이름이 무엇이든 그 가르침의 참다운 이해와 수행은 평화로운 마음의 핵심이며, 따라서 평화로운 세계의 핵심이다. 사람의 마음에 평화가 없다면 타인에게 접근하는 마음에도 평화가 없고 따라서 각 개인 사이나 나라 사이에 있어서도 평화적인 관계는 있을 수 없게 된다. (31)

이 윤회의 세계에서 살아있는 모든 것은 나아지기도 하고 못해지기도 한다. 예컨대 축생에서 인간으로 혹은 인간에서 축생이 되듯이 환생하여 태어나다가 마침내는 수행과 깨달음으로 거듭남을 그쳤을 때 그들은 니르바라(열반)에 드는 것이다. 열반에도 여러 단계가 있지만 가장 높은 경지는 완전한 깨달음인 부처의 경지이다. 윤회의 믿음은 보편적인 사랑을 일깨운다. 왜냐하면 모든 생명들은 그들과 우리의 수많은 생의 과정에서 한 때는 우리가 사랑하는 부모님, 아이들, 형제, 자매, 친구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의 가르침이 장려하는 덕은 이런 보편적인 사랑으로부터 생기는 인내, 관용, 베품, 친절, 자비와 같은 것이다. (32)

화신은 열반의 다양한 경지를 성취했거나 부처, 보살, 그리고 열반이라는 최고의 경지 바로 밑의 경지인 아라한을 성취한 존재들이다. 그들은 다른 존재들이 열반을 향하여 수행하는 것을 돕기 위해 환생한다. 그리고 이렇게 행함으로써 보살들은 부처의 경지에 오르게 되며 아라한 또는 결국 부처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부처는 그들 자신이 이미 가장 높은 경지를 성취하였기 때문에 오직 다른 존재들을 돕기 위하여 환생한다. 그들은 그들 스스로의 어떤 활동적인 의지를 통해 환생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활동적이며 정신적인 과정은 열반에는 자리하지 않는다. 그들은 오히려 그들이 부처의 경지를 성취했던 것을 통해, 타인을 돕기 위한 생득적인 희망에 의해 환생된다. 그들의 환생은 어떤 때이든 상황이 적합하면 가능하지만 이것이 곧 그들이 열반의 경지를 떠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마치 상황이 적절할 때, 달의 영상이 지구상의 잔잔한 호수나 바다에 비쳐지기는 하나, 달 자신은 하늘에서 자신의 모습으로 남아 있는 것과 같다. 똑같은 비유로, 달은 한순간에도 수많은 다른 곳에 반영될 수 있는 것처럼 부처도 많은 다른 몸체에 동시에 환생할 수 있는 것이다. 이 같은 환생된 모든 존재는 내가 이미 지적한 바처럼, 각 생명으로 그들 자신의 희망에 따라 환생할 시간과 장소를 좌우할 수 있다. 그리고 환생 후에도 그들은 다른 사람과 구별될 수 있도록 전생에 대한 기억을 가진다.(32)

나는 때때로 우리가 에베레스트 산을 등반하려는 영국인의 시도를 흥미를 가지고 이해하는지를 질문 받을 때가 있다. 나는 우리가 그렇다고 말할 수 없다. 대부분의 티벳인들은 너무 많은 산길을 올라가므로 그들이 꼭 올라가야 하는 것보다 더 높이 올라가려고 하지 않는다. 그리고 때때로 즐거움을 위해 산에 가는 라사의 시민들은 적당한 높이의 산을 선택한다. 정상에 다다랐을 때는 향을 피우고 기도를 한 뒤 소풍을 즐긴다. 그러한 등산은 기회 있을 때마다 나 역시 즐기는 기쁨이다.(41)

대체로 나의 어린시절은 그리 불행하지는 않았다. 교사들이 나에게 베풀어 준 친절은 언제까지나 나에게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들은 나에게 항상 있었고 또 계속 있을 평안과 영감을 주는 위대한 종교적 지식을 주었다. 다른 문제에 있어서도 건전한 관심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그들은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나는 세속적인 일의 어떤 지식도 가지지 못한 채 성장하였음을 안다. 그리고 바로 그 상태에서 중공의 침략에 대항하여 나의 조국을 이끌라는 요청을 받았다. 내가 열여섯 살 때였다. (41)

그러나 한편으로는 사원들과 수도승 관리들의 승진은 민주적이었다. 어떤 계급의 소년일지라도 사원에 들어갈 수 있으며 그의 승진은 그 자신의 능력에 달려 있다. 그리고 실제로 고위 라마의 환생은 민주적인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왜냐하면 다시 태어나는 라마들은 제 13대 달라이 라마가 그랬던 것처럼 가끔 서민층의 가문을 선택하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처럼 비천한 환경에서 태어난 사람도 승려세계에서 가장 높은 지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45)


3. 마음의 평화

우리 티벳사람들은 종교적이든 세속적이든 간에 쇼나 의식을 좋아한다. 그리고 우리는 의식용의 멋진 옷을 사랑한다. 아마도 국민성으로서 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 국민이 농담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같은 경우를 보고 서양인과 우리가 같이 웃을지는 모르지만 우리 국민은 거의 항상 웃음거리를 지어낼 수 있다. 우리는 서양인들이 만사태평이라 부르는 바로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며 천성적으로 낙천적이다. 우리가 유머 감감을 잃는 것은 가장 절망적인 상황에서 뿐이다. (47)

제도의 모든 결함과 독한 기후에도 불구하고 티벳은 가장 행복한 나라 중의 하나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 제도는 확실히 압제적 여지가 있지만 일반적으로 티벳인은 다른 사람을 압제하지 않는다. 과거 봉건제도에서 흔히 일어나곤 하였던, 인간이 인간에게 가하는 잔학행위는 매우 적었다. 왜냐하면 모든 계층의 사람들에게나, 모든 사건의 흥망성쇠에 있어서 불교가 통제력을 발휘하였고 항구적인 안락을 주는 정신적인 지주였기 때문이다.
다른 종교인들은 종종 한생의 믿음, 즉 카르마(인과응보)의 법칙이 사람들로 하여금 운명의 불평등을 너무 쉽게 받아들이도록 하는 경향이 있다고들 한다. 이것은 단지 부분적으로만 옳을 뿐이다. 가난한 티벳 농부는 그의 부유한 지주에 대하여 별로 시기하거나 분개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그 지주들이 전생에 뿌렸던 씨앗을 거두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떤 인과응보의 법칙도 현생에서 자신의 상태를 개선하기 위한 노력을 좌절시키는 일은 결코 없다. 따라서 우리의 종교가 타인의 운명을 개선하려는 모든 노력을 장려하려 함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진정한 자선은 이중의 은혜를 베푼다. 즉 받는 자는 현생에, 베푸는 자는 현생이나 다가올 그의 생애에서 은혜를 입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티벳인들은 우리의 사회제도를 별 의문 없이 받아들였던 것이다. (51)

국민들은 특히 하급관리들이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정의의 원천에 궁극적인 호소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사실 달라이 라마와 같은 전통과 교육, 그리고 종교적 자비를 가진 통치자라면 절대로 불의의 폭군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행복하였다. 욕망은 불만을 불러 일으킨다. 행복은 평화로운 마음으로부터 온다. 많은 티벳 사람들에 있어서 물질적인 삶은 어렵다. 그러나 그들은 절대로 욕망의 희생자들이 아니다. 우리는 세계의 도시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마음의 평화를 산중의 소박함과 가난에서 느끼고 살았다. (51)


4. 이웃나라 중국

내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기보다는 오히려 나는 저명하고 공평한 전문가들이 UN에 제출한 <티벳문제와 1959년 법의 규칙>이란 그들의 보고서에서의 결론을 인용하고자 한다.
‘1912년 중국인들을 추방한 티벳의 지위는 사실상의 독립국의 하나로서 공정하게 서술되어질 수 있으며 거기에는 중국에의 어떤 형태의 법적인 추종도 사라졌다고 생각할 수 있는 강한 근거가 있다. 그러므로 1911~12년의 사건들은 티벳이 완전한 주권국가이며 중국의 통제로부터 벗어나 독립국으로의 재발족을 이룩했다는 사실을 명시한다.’ (60)


5. 침략

그러나 지금 우리는 군사위협뿐만 아니라 우리가 아는 한 티벳인 모두가 극도로 싫어하는 유물론적 사조의 지배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는 것이다. (62)

이러한 재앙들이 멀리 떨어진 티벳의 동쪽 변경지대에서 일어나고 있는 동안, 라사의 정부는 예언자와 정부의 책임을 떠맡아야 한다는 중대한 요청을 들고 나를 만나러 왔다.
이 일은 나를 불안에 떨게 했다. 나는 겨우 열여섯 살이었고, 나의 종교 교육을 끝내려면 아직 멀었었다. 나는 세상일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몰랐으며, 정치적인 경험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내가 얼마나 무식한지, 배워야 할 것이 얼마나 많은지는 알 정도의 나이였다. 처음에 나는 너무 어려서 안 된다고 했다. 달라이 라마가 섭정관으로부터 실질적인 통치를 넘겨받는 나이도 열여덟 살이었다. 그러나 나는 예언자와 라마승들이 왜 그러한 요청을 하게 되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각 달라이 라마가 죽은 뒤에 들어서는 오랜 섭정은 우리 정부의 조직을 필연적으로 약화시켰다. 내가 아직 미성년이었을 때, 우리 정부 내의 각 부처 사이에 분쟁이 계속되었으며, 나라의 행정은 타락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책임을 지기보다는 어떻게 해서든지 책임을 회피하려고 했다. 그러나 지금 침략의 위협 아래 그 어느 때보다 단합이 필요하며, 달라이 라마로서 나는 이 나라 사람 모두가 만장일치로 따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는 두려운 마음으로 요청을 받아들였고, 전통의식에 따라 전권을 부여받았다. 나의 이름으로 일반 사면이 포고되어 티벳의 감옥에 있는 모든 죄수들이 자유를 얻었다. (64)

젊고 강건한 남자로서 나의 본능은 민족이 겪는 위험이라면 무엇이든 같이 나누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티벳인들에게 달라이 라마라는 존재는 가장 귀중한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갈등이 발생하든 내가 자신을 생각하는 것보다는 국민들의 보살핌에 나를 떠맡겨야만 했다. 그래서 나는 떠날 준비를 했다. (65)

물론 이제 우리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우리의 정책이 어떻게 해서 우리를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 이르게 했는가를 쉽게 알 수 있다. 1912년 완전한 독립을 성취했을 때, 우리는 고립에 안주하는 데 크게 만족했다. 우리의 독립이 우리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라서 외부세계의 어떤 법적 증명이 필요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만약 국제연맹이나 국제연합에 가입했다든지 이런 위가가 오기 전에 몇몇 강대국에 대사라도 임명했더라면 독립국으로서의 증거들은 별 문제 없이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또 그렇게 했더라면 우리의 명백하고도 정의로운 주장이 지금처럼 전혀 다른 상황에서 만들어진 옛 조약에 근거한 난해한 법적 토의에 의해 흐려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어떤 한 민족이 전혀 악의 없는 고립 속에서 살아가기엔 세상이 너무 좁아졌다는 쓰디 쓴 교훈을 얻었다. (66)

처음에는 내가 중국 장군들을 만날 때마다 나의 두 수상은 나에게 조언하기 위해 모임에 항상 참석했었다. 그러나 한 모임에서 장진우 장군은 나의 수도승 수상인 로상 타쉬가 말한 것에 대해 대단히 화를 냈다. 이것은 당시 나에겐 하나의 충격이었다. 나는 전에 그처럼 행동하는 어른들을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비록 나이는 어려도 그를 진정시켜 조정해야 하는 사람은 바로 나였다. 그 후부터 그들은 나와 단독으로 만나기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73)

나는 매우 어려운 결정을 해야만 했다. 나는 중국에 의연하게 맞서는 루캉와의 용기를 크게 칭찬했다. 그러나 지금 나는 그를 계속 놔둘 것인지 아니면 또 다시 중국측 요구에 굴복해야 하는지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두 가지 문제를 고려해야만 했다. 즉 루캉와의 개인적인 안전과 우리나라의 전반적인 장래문제였다. 첫 번째 문제에 대해선 의심할 여지가 없다. 루캉와는 이미 그의 생명을 위험에 내놓았다. 만일 내가 그의 해임을 거절한다면 중국은 그들의 방식대로 그를 제거해 버릴 것은 분명했다.
더 전반적인 문제에 관한 나의 견해들은 이 긴 긴장의 시기를 통해서 형성되었다. 나는 아직도 국제정치의 복잡성에 대한 이론적 훈련이 없었다. 나는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단지 나의 종교적 훈련만을 적용할 수 있었으며, 나의 상식에 도움을 얻었다. 그러나 내가 믿었고 또 여전히 믿는 종교적 훈련은 매우 신빙성 있는 지침이었다.
나는 만일 우리가 계속 중국당국에 반대하고 그들을 화나게 한다면 그것은 단지 우리를 더욱 압제와 원한의 악순환에 이르게 할 뿐이라고 판단했다. 결국은 육체적 폭력의 반발을 초래할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폭력은 무용(無用)하다. 우리는 어떤 수단으로도 중국을 제거할 수 없었다. 만일 우리가 그들과 싸운다면 그들은 항상 승리할 것이고, 아무런 무기도 없고 조직도 없는 우리 국민들만 희생될 것이다. 우리의 유일한 희망은 그들이 협정에서 한 약속을 평화적으로 완수하도록 설득하는 것이다. 아마 몇 년의 인내 후에는 비폭력은 결국 어느 정도의 자유를 획득하게 해줄 유일한 길이라고 믿었다. 그것은 가능할 때는 언제든지 협동하고, 그렇지 않을 때는 소극적 저항을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폭력적인 대항은 실용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비윤리적이다. 비폭력이 오직 유일한 도덕적 방책이다. 이것은 나의 내면의 신앙뿐 아니라 분명히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었다. 그리고 티벳의 종교적 지도자로서 그것을 지켜야만 했다. 우리는 굴욕당할 수도 있고 가장 신성한 전통들을 잃어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겸손은 우리의 운명이어야 했다. 나는 그것을 확신했다.
출처 : 박근형의 티베트 사천 자료실
글쓴이 : berdl28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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