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코르 광장 전경
-40년 세월의 恨 … 천년 길손들이 香으로 위로
- 드디어 라싸(拉薩)에…
옥수(玉樹)에서 한 동안을 보낸 문성공주 일행은 황하의 발원지인 바엔카라 산맥과 당구라 산맥을 넘어 토번왕국의 본토인 설역고원에 들어섰다.
그리고는 길을 재촉하여 도읍지였던 라싸에 도착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그 날이 석가의 탄생일(佛誕日)인 4월15일이었다고 하지만, 그러나 당시 토번에 불교가 아직 전래되지 않았던 점을 감안하면, 이는 훗날 티베트가 유래가 드문 종교왕국으로 변한 뒤에 역사적 사실까지도 불교적 행사로 끼워 맞추기 위한 수순의 하나라고 보여 진다.
사서에서 옥수를 떠난 공주의 행적이 오리무중인 것에 비해, 공주의 라싸입성은 선명하게 묘사되고 있다. 당시 온 나라의 백성이 거리에 나와 공주일행을 춤과 노래로 환영하였다고 하는데, 당시의 광경이 오늘날 포따라 궁전에 생생한 벽화로써 남아 있다.
라싸에 도착하여 공주가 맞닥트린 현실은 국왕 송첸감뽀에게는 이미 4명의 손위 시앗들이 질투의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는데 있다. 정비(正妃)인 멍싸왕비, 네팔왕국의 부리쿠티 이외에도 명문귀족 출신의 두 명의 왕비가 더 있었지만, 그녀는 당이라는 후광과 함께 선천적인 지혜로움으로 시앗들의 견제 속에서도 남편을 도와 온갖 난제들을 풀어나가며 나라를 당과 맞먹는 제국으로 키워나갔다.
- 조캉사원(大昭寺)의 건립
현재 `하늘열차' 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칭짱열차(靑藏列車)'의 개통으로 세계적인 관광지로 탈바꿈해가는 라싸의 중심은 붉은 언덕위에 솟아있는 백악의 성인 포따라궁전이다. 라싸는 이 궁전을 중심으로 동서로 구분되어지는데, 서쪽은 중국식 신도시로 개발중이지만, 동쪽은 티베트식의 전통건물이 즐비한 곳으로 그 중심에는 조캉사원이 자리 잡고 있다.
라싸의 심장인 이 사원의 창건설화에 문성공주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천문지리와 주역(周易)에도 조예가 깊었던 그녀가 살펴보니 라싸는 거대한 마녀(魔女)가 엎드려있는 형국이었다. 포따라 그리고 마주보고 있는 약왕산(藥王山)은 마녀의 두 유방에 해당되었기에 그 심장에 해당되는 와탕호수에 사원을 세워 마녀의 요기를 차단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하여 3년간의 난공사 끝에 당시 호수였던 곳을 수천마리의 양떼로 하여금 흙을 날라서 메우고 나서 그 위에 사원을 세웠다. 그리고는 공주가 직접 장안에서부터 시집올 때 모셔온 `조오'라는 이름의 불상(佛像)을 봉안하였다. 바로 오늘날 `조오의 집'이란 뜻의 `조캉'사원 또는 한문식으로는 대조사로 불리는 곳이다.
지금도 라싸에 살고 있는 민중들의 하루일과 중에 가장 중요한 일은 조캉사원을 한 바퀴 돌고나서는 안으로 들어가 조오부처에게 참배하는 순례행위이다. 이것은 전 세계에서 모여드는 관광객들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사원을 둘러싸고 있는 그 팔각형 순례로인 `바꼬르' 광장에 설역의 모든 볼거리, 살거리, 먹거리가 모여 있기 때문이니까.
- 한 많은 40년 세월
650년, 남편 송첸 임금이 승하하였을 때 문성공주는 서른 살도 채 되지 않았다. 말하자면 청상과부(靑裳寡婦)가 된 것이다. 결혼 9년차이었지만, 그중 남편의 출정기간을 빼고 나면 정말로 짧은 결혼생활이었다. 그것도 `갸싸' 즉 `중국공주'라는 차별적 호칭으로 불리며, 호랑이 같은 4명의 손위 시앗들의 눈치를 보면 산 세월이었다.
토번 최대의 영웅인 송첸 임금의 유체는 3개월간의 장례식 끝에 조상들의 땅인 야룽계곡의 총게의 길지에다 지하궁전을 만들어 수많은 보물과 순장품과 함께 묻혔다. 그리고는 그 위에 도굴방지를 위해 거대한 인공봉분이 만들어졌다. 이 때 백성들은 이렇게 읊으며 슬퍼하였다 한다.
“성스러운 얄라삼뽀산 꼭대기에서 태양은 허공으로 떨어졌고 밝은 보름 달은 구름에 가렸으니 임금의 용안은 이제는 볼 수 없구나…”
당시 문성공주는 슬하에 자식도 없었기에 당나라의 풍속으로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는 있었지만, 토번왕국의 풍속은 그렇지 않고 또한 당시 두 나라간의 상황도 공주가 귀국할 수 없게 만들었다. 문성공주가 세상을 떠난 것은 680년이다. 고희(古稀)를 넘긴 나이이니 당시로써는 드물게 오래 산 셈이다.
정략결혼의 희생양이 되어 머나먼 이국땅에서 보낸 한 많은 40년 세월!
그 사이의 공주의 행적에 대하여는 두 나라의 역사서는 모두 한 줄의 기록도 남기지 않고 있어서 공주의 말년이 어떠했는지를 알 수는 없다. 그러나 토번왕조의 왕들이 묻혀있는 총게고분군(古墳群)의 고고학 조사에도 불고하고 문성공주의 무덤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이 사실은 한 세기 뒤에 역시 정략결혼으로 시집온, 문성의 조카벌되는, 금성(金城)과 좋은 대비가 된다. 왜냐하면 금성공주는 남편과 아들 티송테 근처에서 커다란 봉분을 과시하며 누워있기 때문이다. 이는 문성공주의 말년이 얼마나 쓸쓸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해주는 대목이다. 아마도 문성공주는 그녀가 직접 세운 불당에 앉아 염불이나 외우며 그 긴 인고의 세월을 보냈을 것이다. 그리고 내생에서는 “그냥 평범한 갑남을녀로 태어나 남편을 다시 만나 한 평생 해로하게 해달라고” 그렇게 기원했을 것이다.
그러나 어쩌랴, 그런 것이 유정한 중생들이 걸어야할 무정한 역사 속의 야속한 세월인 것을…!
만약 그녀가 장안에 남아 평범한 한 공주로써의 일생을 보냈다면 어찌 천추에 이름 석자 남길 수 있었으며 또한 천년 뒤에 찾아 온 이방의 길손들에게 향(香供養)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인가?
다정 김규현(티베트문화연구소장)
(강원일보 문화면 2007-1-19 기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