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성공주의 서러운 울음소리 들리는가
홍천강 수리재(水里齋)에 은거하고 있는 티베트문화연구소장 다정(茶汀) 김규현화백의 `당번고도(唐蕃古道)’ 기행을 5회에 걸쳐 특집으로 싣는다.
`당번고도'는 중국의 서안(西安)에서 티베트자치구 라싸에 이르는 3,000여㎞다. 이 길은 군사, 문화, 종교, 교역 등 다방면의 국제적 루트 역할을 한 또 다른 `실크로드’였다.
티베트 역사·문화에 관해 여러권의 책을 펴낸 김씨는 이 길은 한 달간 여행하며 `KBS역사기행' 프로그램 리포터 역할을 맡아 촬영하기도했다.
-`당번고도’란?
당번고도란 다소 생소한 용어는 당나라의 도읍지였던 장안(長安城), 즉 현재 협서성(陜西省)의 서안(西安)으로부터 티베트의 옛 이름인 토번(吐蕃)왕국의 수도였던 현 티베트자치구의 라싸(拉薩)까지의 약 8,000리(3,000km)의 옛길을 말한다.
일반적으로‘당번고도’는 641년 당 태종(唐太宗)의 딸인 문성공주(文成公主)가 토번왕국으로 시집간 이후 개통되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당과 토번이 흥성하던 7세기서부터 9세기까지 2백년간 빈번했던 루트였다. 그 동안 공식적인 사신들이 142차례나 왕래하였을 정도로 중요한 교역로로써 군사, 문화, 종교, 무역 등 다방면의 역할을 한 또 다른‘실크로드’의 하나였다.
또한 이 길은 라싸에서 머물지 않고 나아가 대설산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인도, 즉 천축(天竺) 그리고 서역으로까지 이어지는 국제적인 루트였다.
문성공주의 발자국을 따라 장안성을 떠나 머나먼 길에 오르기 전에 먼저, 당시 국제 정세를 잠시 돌아볼 필요가 있다.
문성공주가 토번으로 시집간 배경에는 당시 두 나라의 명분과 실리를 챙기기 위한 정략적인 목적이 있었다. 이른바 화친혼(和親婚)이다. `정관(貞觀)의 치(治)’란 업적으로 당나라를 반석에 올려놓은 당 태종 이세민은 당시 수나라 때부터의 숙원과제인 동쪽의 고구려침공을 준비하고 있던 터라, 전략적 이유로 후방인 설역(雪域)고원 티베트와 서역제국을 견제할 목적으로 그 길목의 요충지인 청해호반의 토욕혼이란 유목국가와 손을 잡고 있었다.
- 당과 토번의 격전지였던 청해호(靑海湖)
한편 당시 태곳적부터 외부 세계와 단절된 설역고원(雪域高原) 티베트의 상황은 어떤가? 영웅은 호적수를 데리고 태어난다던가?
그곳에는 당태종을 견제할 운명을 타고 태어난 불세출의 한 영웅이 기지개를 피고 있었다. 바로 토번의 33대 첸뽀(大王)인 송첸감뽀(617-650)이다, 그는 얄룽계곡이라는 고대왕조의 좁은 울타리를 벗어나 주위의 군소왕국들을 차례로 제압하며 큰 날갯짓을 위해 넓은 라싸분지로 도읍을 옮겼다. 그리고는 티베트문자를 만들어 행정과 군사제도를 정비하는 등 안살림을 챙기면서 남쪽 네팔왕국의 공주를 데려와 후방을 안정시켰다. 그 다음 부친의 유지를 받들어 천혜의 목초지인 청해호를 노려보고 있던 때였다. 당시로서는 좋은 전마(戰馬)의 생산은 곧 국력이자 전투의 승리였고 또한 청해호는 서역으로 가는 목덜미였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두 신흥 강대국인 당과 토번의 충돌은 피할 수 없었다.
청혼거절을 핑계 삼아 토번의 막강한 기병은 청해호반으로 밀려들어 갔다. 바로 향후 2백년간 벌어진 당과 토번과의 `긴 싸움’의 서막이었다. 여기서 필자가 `긴’을 강조한 이유는 아직도 그 싸움은 진행형이라는데 있다.
하여간, 지금은 뒤바뀌어 있는 처지이지만, 그 첫 싸움은 토번의 멋진 한판 승리였다. 토번의 기병은 당나라의 보호아래 있었던 토욕혼 왕국을 점령하고 서역으로의 목줄을 조인 다음 다시 방향을 동남쪽으로 향해 사천성(四川省) 서북부의 군사요충지인 송주(松州)를 포위하고는 공주를 내놓으라고 군사들에게 노래를 부르게 하였다.
- 아 대비천(大菲川)의 그날이여
장안을 떠난 필자일행은 서녕(西寧)과 청해호 근처에서 옛 전쟁터만을 찾아다녔다. 대개 옛 전쟁터에서는 묘한 허무감을 느낄 수 있지만, 그중 석보성(石堡城)과 대비천은 더욱 인상적이었다. 전자는 수십만의 군사들이 피를 흘려가며 공방전을 벌렸던 치열함으로, 후자는 우리 역사와 관련된 인물이 등장함으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었다.
요즘 국내 3개 방송사가 경쟁적으로 내보내고 있는 고구려관련 연속극에 자주 등장하는 몇몇 인물들이 모두 고구려 멸망 뒤 바로 토번과의 전투에 등장하는데, 그들은 하나 같이 패전하였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면,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키는데 큰 공을 세운 설인귀(薛仁貴)가 670년 청해호 남쪽에서 벌어진 대비천 전투에서‘라싸도행군대총관’으로 기고만장하게 참전하지만 토번의 명장 첸릉(欽陵)에게 참패해 부장들과 함께 포로가 되었으나 당나라가 토곡혼의 점령을 인정하는 조건으로 방면시켜주었으나 당 고종(高宗)은 그를 서민으로 강등시켰다고 한다. 그 외에도 백제 멸망의 주역인 소정방(蘇定方)도 토번과의 전쟁에서 패하였다. 다만 흑치상지나 고선지 같은 백제와 고구려의 유민장수들이 그런대로 토번을 상대로 큰 공을 세웠다는 식의 역사의 후일담 등을 곱씹어보면 역사의 아이러니를 느끼게 한다.
특히 한 때 당나라를 위협했던 대제국이었던 토번이 종교와 정치를 구분하지 못한 원인으로, 근대에 들어 중국에 합병되어 있는 현 상황을 보면 더욱 그러한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게 된다.
계속...제2회 ‘눈물바다 일월산(日月山)을 넘어…로 이어집니다.
다정 김규현(티베트문화연구소장)
[강원일보 2006-12-02 0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