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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中역사교과서 왜곡] 동북공정 연구결과 이미 일부 반영

chomice 2007. 12. 13. 14:57
지난 1일 중국 학생들에게 배포된 중·고교 중국사 및 세계사 등 역사 교과서. 상당 부분 고대사를 왜곡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사진/홍인표 특파원

고구려와 발해, 고조선 역사를 중국사로 포함시킨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과 중국 중·고교 역사(중국사·세계사) 교과서는 ‘동전의 양면’이라는 게 베이징 관측통들의 분석이다. 동북공정 연구 결과가 학계의 전반적인 인정을 받을 경우 언젠가는 교과서에 일정 부분 반영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일부 학자들은 삼한이 중국의 식민지라거나 기자조선에서 위만조선, 고구려, 부여, 발해 등 5개국을 중국 고대 소수민족정권이라고 주장하고 있어 파장을 예고하고 있다. 고조선과 삼한, 고구려, 발해 등 시대별로 중국 학계의 연구 결과와 중국 교과서의 내용을 비교 분석해본다.

▲삼한은 중국의 식민지=동북공정에 참여하고 있는 장비보(張碧波) 중국 헤이룽장(黑龍江)성 사회과학원 연구원은 이번에 발표한 ‘기자(箕子)와 기자조선 연구’라는 논문에서 삼한이 중국 상(商)나라(은나라라고 함)의 해외 속국이었다고 주장했다. 당시 상나라의 대표적인 철학자였던 기자가 당시 주왕의 폭정에 따른 멸망을 맞아 한반도로 간 것도 한반도가 바로 해외 속국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결국 기자조선은 상나라 유민이 한반도에 세운 지방정권이었다는 설명이다. 장 연구원은 기자조선은 위만조선에 멸망했고, 위만조선은 한나라에 망해 한나라는 한반도에 한4군을 설치했으며, 이는 훗날 고구려와 발해로 이어진다고 보면서 기자조선이 중국 동북지방 역사의 출발점이라고 지적했다.

중국 역사교과서는 현재 ‘기자조선’이라는 표현을 구체적으로 쓰고 있지는 않다. 일부 교과서는 진나라와 한나라 때 수만명이 한반도로 유입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당시 한반도와 깊은 관계가 있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특히 한반도 남부에 있었던 삼한(三韓·마한·진한·변한)에 대해서는 한나라 무제 때 여러차례 사신을 보내왔다고 밝히고 있다. 특산물인 과하마와 활을 중국에 수출하고 중국의 구리거울, 칠기, 철제 농기구를 받아들였다고 전하고 있다. 이에 대해 국내 학자들은 기자가 전설 속의 인물이며, 실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고 있다.

▲발해는 중국의 고대 소수민족정권=웨이궈중(魏國忠) 헤이룽장성 사회과학원 연구원은 논문 ‘발해국사’를 통해 발해의 주도세력은 말갈인이며 고구려 사람들은 보조적인 위치에 있었다고 밝혔다. 그는 특히 당나라 현종이 발해 정권을 발해군으로 지정했고, 우두머리를 발해군왕으로 임명했다는 데 주목하고 있다. 발해군은 책봉국과 달리 당나라 장관의 지시를 받아야 한다는 설명이다. 웨이 연구원은 발해는 주권이 완전한 주권국가가 아니며, 당나라에 예속된 하나의 지방민족정권이라고 못을 박고 있다.

중국 역사교과서도 발해가 중국 소수민족 정권이라는 입장은 분명하다. 인민교육출판사가 펴낸 중학교 1학년 ‘중국역사’ 하편에는 토번(오늘날 티베트), 회흘(오늘날 신장 위구르자치구)과 남소(오늘날 윈난성) 등과 함께 발해를 다루고 있다. 교과서는 “발해 정권은 수시로 귀족 자제들을 장안(당나라 수도. 오늘날 시안)에 보내 당나라 문화를 배우도록 했다”고 밝히면서 당과 밀접한 관계였음을 강조했다. 발해를 세운 대조영에 대해서도 일부는 아예 표현을 하지 않고 있으며, 대다수 교과서는 대조영이 고구려 유민이라고 밝히지 않아 말갈족의 수령임을 암시하고 있다.

성균관대 동아시아 학술원의 한 관계자는 “중국은 이미 1960년대부터 발해를 자기네 역사에 편입해 교과서에 수록해왔다”며 “발해를 고대 소수민족정권으로 본다는 내용이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교과서에서 찾아보기 힘든 고구려=동북공정을 주관하고 있는 중국사회과학원 변경사지 연구중심 리다룽(李大龍) 연구원은 변강사지 웹사이트에 올려놓은 논문에서 “고구려는 700여년 동안 지속된 정권이지만 줄곧 중국 대륙의 왕조와 예속 관계를 유지해왔다”며 고구려는 중국 고대 소수민족정권이라고 못박고 있다. 리 연구원은 특히 고구려와 고려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선언적인 의미에 불과할 뿐 고씨 고구려와 왕씨 고려는 분명히 구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중국 역사교과서는 고구려라는 표현을 잘 쓰고 있지 않다. 일부 교과서는 고대 한반도에 삼국이 있었다며 고구려 대신 고려를 쓰고 있다. 오히려 신라와의 관계를 강조하는 기술은 적지 않게 눈에 띈다. 고교 중국고대사는 신라 기마토기상 사진을 싣고 “신라방과 신라관이 장안과 연안 도시에 많이 들어서 신라 상인들을 접대했다”고 밝히고 있다.

▲기자조선, 부여도 중국 지방 정권=동북공정에 참여하고 있는 자오룬밍(焦潤明) 랴오닝(遼寧)대학 교수는 논문 ‘국제법과 북중 변경 논쟁 문제’에서 국제법과 국제관례, 그리고 중국 역사책과 기존 연구성과에 따르면 기자조선, 위만조선, 고구려, 부여, 발해 등 5개 동북지방정권은 모두 중국 황제의 치하에 있던 지방정권이라고 주장했다. 자오 교수는 이와 함께 한족계, 숙신계, 동호계와 함께 예맥계도 모두 중국에 속하는 계통이라고 지적했다. 고구려는 부여에서 왔고, 부여는 숙신 계통의 퉁구스족(훗날의 여진족)이라는 설명이다. 발해도 고구려의 후예가 아니라 숙신족의 후예인 속말말갈족이라고 보고 있다. 자오 교수는 “1894년 청일전쟁 이전 한반도와 중국의 국경 문제는 이 같은 역사적 사실에 따라 해결할 수 있다”고 밝혔다.


동북공정 성과물로 나온 책자 ‘고구려 민족과 국가의 형성 및 변천’은 한민족의 뿌리가 기원 전 11세기 기자가 상나라 유민 5,000명을 이끌고 한반도로 이주해 대동강 유역에서 원주민인 동이(東夷)인과 민족융합을 이루면서 고조선인을 형성했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들이 후에 한4군의 하나인 낙랑군 주체민족이라는 설명이다. 또 고구려는 부여에서 나온 것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면서 동부여와 고구려는 모두 해모수가 세운 북부여에서 갈라져 나온 부족으로 보았다. 민족 구성과 관련, 부여인이 남하해 고구려의 통치집단을 구성했지만 고구려족의 주축 세력은 예맥족 등 토착민족이며 숙신과 말갈 등도 포함된다고 밝혔다. 단일민족이 아니라 복잡한 민족 융합체라는 설명이다.

중국 교과서는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기술을 하지 않고 있다. 다만 동북공정의 결과에 따라서는 언제든 교과서에 반영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 우려할 만한 대목이다.

〈베이징|홍인표특파원 iphong@kyunghyang.com

[경향신문 2006-09-06 22:36]

출처 : 박근형의 티베트 사천 자료실
글쓴이 : berdl28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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